크바틸의 아이들
8월을 목전에 둔 여름날, 남부지역 순회방문 두 번째 시즌을 시작했습니다. 이번 여정은 지난해보다 날짜도 더 길고 방문할 장소도 더 많아서 저의 체력도 걱정되었지만 각 모임에서 원하는 날짜를 맞추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보드게이머들에게 "전주의 상징"이 되어버린 "같이놀다가게"를 가장 먼저 방문해 보았습니다. 사실, 원래는 "같.놀.가" 방문 예정이 없었습니다만 그곳의 사장님인 히미끼 님이 저 때문에 휴가를 며칠 당기셨다고 하셨고 히미끼 님이 제게 보내신 쪽지에
"대학생 친구들이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고 적어놓으셔서 마음이 약해졌죠. ㅎ (알고 보니 그들은 저의 도장깨기를 막아낼 전주의 용사들이었던 것입니다... 엉엉엉 ㅠㅠ)
아침 일찍 기차를 타려고 했으나... 마이 갓! 휴가철이어서 기차표가 모두 매진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저의 튼튼한 두 다리를 믿고) 전주까지 입석을 탔습니다. 같.놀.가 앞에서 정오에 뵙기로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죠.
전주 역에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저마다 백팩을 매거나 캐리어를 끌며 밖으로 밖으로 무리를 지어 이동했습니다. 열차에서 내리자 느껴지는,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 이번 여정의 고난이 벌써부터 느껴졌습니다.
전주 역에서 버스를 타고 남부시장 근처에서 내렸습니다. 사람들을 향해 내리꽂히는 햇볕. 얼굴에 등에 땀이 계속 흘러내립니다. 드...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같.놀.다의 정신이 반영된 것 같은 그림
왼쪽 여자는 공중에서 주사위를 정확하게 같은 눈금으로 만드는 금손,
가운데 남자는 유흥, 오른쪽 남자는 술병...;;;
왼쪽 여자는 공중에서 주사위를 정확하게 같은 눈금으로 만드는 금손,
가운데 남자는 유흥, 오른쪽 남자는 술병...;;;
예정 시간보다 먼저 도착해서 배도 살짝 고프고 목도 말라서 같.놀.다 앞에 있는 가게에서 병맥주와 고구마 크로켓을 시켜서 먹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그 가게 사장님께 여쭤봤습니다.
"같.놀.가 사장님 몇 시에 나오세요?"
"어... 보통... 2-3시요?"
'헉스...!'
약속 시간을 12시로 잡았는데, 두세 시 즈음에 나오시는 건 아니겠죠...?
밖에서 앉은 제 테이블에 글귀가 적혀 있었는데, 많이 와 닿았습니다.
여행 - 여행하는 것처럼 생활하고 생활하는 것처럼 여행하자.
대략 12시 45분 즈음이 되자, 히미끼 님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역시 뭔가 먹길 잘 했어;;;) 같.놀.다의 정신을 지키시기 위해서 전날 밤에 술을 즐기시고 늦잠을 주무셨다능. 그리고 작년에 일인반닭을 베푸신 닭셰프 님도 오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5분 후에 오실 거라고 하셔서 둘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죠. 그런데 10분이 넘도록 우리 닭셰프 님이 오지 않으시는 겁니다;;; 15분 정도 지나자 온몸에 땀을 흘리시며 그 분이 나타나신 겁니다. (지구 시간으로 몇 분을 기다려야 하는지 물어볼걸... ㅠㅠ 시공간이 왜곡되어 있는 전주.) 히미끼 님과 결론이 나지 않았던 난제, 점심 메뉴 고르기 (;;;)를 늦게 오신 벌칙으로 닭셰프 님께 떠 넘겼습니다. 그러자 우리 셰프 님은 콩국수를 선택하셨습니다! 오~옷!
남부시장 근처에 있는 진미집은 오래된 콩국수집이라고 합니다. 40년 가까이 된 것 같던데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 콩국수는 특이하게 설탕이 많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단맛을 싫어하면 꼭 설탕을 빼달라고 해야 한다는군요. 닭셰프 님이 설탕이 들어간 게 전주 스타일이라고 하셨지만 히미끼 님은 설탕을 빼고 드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모르니까 그냥 닭셰프 님을 따라서... 먹어 보니까 단맛이 강해서 간식 먹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같.놀.다로 돌아왔습니다. 가게 안에는 히미끼 님이 태경 언니 (;;)라고 부르는 여자 분이 계셨습니다. (작년에 방문했을 때에도 이분 얘기가 나왔는데 여행 중이셨다고 했습니다.) 히미끼 님도 오는 토요일에 광주 당일치기 여행을 가실 계획이셔서 준비를 하신다며 빠지셨고, 태경 언니 님과 저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온 인혁 님 셋이서 게임을 하기로 했습니다만 게임을 쉽게 고르지 못하자 제가 가져간 게임을 하기로 했죠.
체코의 유명 게임 디자이너인 Vlaada Chvátil 블라다 크바틸 씨의 Dungeon Petz 던전 페츠. 크바틸 씨하면 Through the Ages: A Story of Civilization 쓰루 디 에이지스를 비롯하여 Mage Knight Board Game 메이지 나이트 보드 게임 등으로 알려져 있지만 저는 Space Alert 스페이스 얼럿 때문에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같.놀.다에 와서 한쪽에 쳐박혀 있던 스페이스 얼럿을 발굴하여 이곳 분들께 알려드린 바 있죠. (링크: 뜻밖의 방문 제3부 - 전라북도 전주편 1일차 (06/01-06/02))
올해에는 크바틸의 게임들 중에서 던전 페츠를 가져가 봤습니다. 이 게임은 어릴 적에 한번 쯤 해봤던 다마고치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지금 10대, 20대들은 모름;;;) 던전에서 키우던 괴물들로 펫 사업을 하는 내용이에요. (링크: Dungeon Petz 던전 페츠)
설명을 드리자 태경 언니 님은 좀 어렵다고 말씀하셨는데 조금 지나니까 테마에 몰입을 하시면서 재미있어 하시더라고요. 인혁 님은 조용히 잘 하심... (뭐야, 무서워;;;) 결론은 설명하고 꼴등... (도장깨기 실패 ㅠㅠ)
던전 페츠를 하는 동안에 다른 분들도 많이 오셨습니다. (예전에 모임 활동을 같이 하다가 대전으로 이사가신 카이 님도 오셨고요. 반갑습니다! ^^) 같.놀.다 안이 가득찼죠. 이미 다른 게임을 하고 계시는 분들도 있었는데요. 남은 분들끼리 스페이스 얼럿을 하기로 했습니다. 작년에 이미 경험을 한 히미끼 님과 닭셰프 님, 저는 빠졌어요. (크바틸 게임답게 설명을 들어도 알 수 없는 게임의 분위기.) 겁을 먹은 분들에게 히미끼 님과 제가
"튜토리얼은 너무 쉬워서 아무것도 안 해도 클리어할 수 있어요."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전주는 우리도 몰랐던 아주 특별한 곳이었던 것입니다;; 처음엔 서로 꿀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말도 하지 않다가 나중엔 사운드트랙도 듣지 않고 서로 외치다가 게임이 끝나버렸습니다. 그리고는 튜토리얼 1번을 클리어하지 못하고 우주선을 부숴먹은... (뭐야, 이거 무서워...;;;) 처음 해본 사람들보다 이미 해본 3인 (히미끼 님, 닭셰프 님, 저)는 멘붕을 하고. 다시 튜토리얼 2번을 시켜보기로 했습니다. 한 분이 캡틴의 역할을 하기로 하고 나름 지시를 열심히 내렸습니다. 이미 해본 3인은 내심 기대를 했죠. 1단계는 무사히 넘어간 것 같았지만 2단계에 들어가자 사람들이 서서히 패닉에 빠지기 시작하고, 급기야 캡틴은 격렬히 아무것도 하고 싶어하지 않아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스스로 프로그래밍을 했습니다. (살려야 한다) 이미 해본 3인은 그저 웃음만... ㅋㅋㅋㅋㅋ
하지만 전주는 정말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프로그래밍이 꼬여서 클리어하지 못할 뻔 했으나 아무도 예상못한 잘못 쏜 레이저 캐논이 외부 위협을 부수며 클리어를 한 것입니다. (말도 안 돼! ㅋㅋㅋ) 플레이어들은 환호를 했고, 게임을 접었습니다. (기분 좋은 상태에서 끝내고 싶었나 봅니다.)
그 다음으로 War of the Ring 반지의 전쟁을 하기로 했습니다. 작년에 이 게임을 전파한 이후로 전주 분들 사이에서 관심이 부쩍 늘었고 몇몇 분은 해보셨다고 합니다. 4명이 두 팀으로 나눠서 2인 룰로 진행했습니다.
자유민족이 부지런히 모르도르로 달리는 한편 마음 착한 암흑군단은 병력을 모았지만 쉽사리 밀어내지 못했네요. 결국엔 부대를 찍어낸 죄밖에 없는 사루만이 혼자 있다가 엔트들에 핵꿀밤을 맞고 죽어버리고 맙니다. ㅠㅠ 반지-운반자들은 비운의 산 꼭대기에 도착해서 반지를 빠뜨리고 게임을 끝냈습니다. (산에 오르는 동안에 치유도 한... 이거슨 삼림욕?)
반지의 전쟁을 하는 동안에 다른 테이블에서 자꾸 배고프다고 해서 밥 먹은지 얼마 안 되었는데 벌써 배고프다고 하나 싶어서 시계를 보니 벌써 9시... 설명 1시간, 진행 2시간 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게임에 집중했네요. 더 늦기 전에 저녁을 먹으러 갔습니다. 남부 시장에서 파는 피순대인데요. 일반 순대와 달리, 건조하지 않고 아주 촉촉하고 부드럽습니다. ㅎ
식사를 마치고 철민 님이라는 분하고 일대일로 반지의 전쟁을 했습니다. 몇 번 해보셔서 룰을 많이 알고 계셨고요. 저와 플레이하면서 나머지 규칙을 잡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숙련자들의 플레이답게 매우 빠르게 진행됐습니다. 저는 암흑군단으로서, 빠르게 사루만의 군대로 로한을 밀어버리고, 모르도르와 돌 굴드르, 동부의 군대들을 북동쪽으로 몰려서 데일-에레보르-우들랜드 렐름을 빠르게 점령해갔습니다. 하지만 프로도는 너무나 빨랐습니다. 100분만에 자유민족은 반지를 파괴하고 게임을 끝내 버렸습니다. ㅠㅠ
철민 님이 에레보르 쪽이 밀릴 거라고 생각을 못 했다고 하셨습니다. 반지의 전쟁을 여러 번하면 로한이나 곤도르 중 하나를 살리는 기술이 생깁니다. 가깝고 쉽게 얻을 수 있는 점수 지역이 막히면 다른 방안을 찾게 되는데, 그게 북동부를 밀어버리는 것이죠. 그쪽도 승리 점수가 5점 이어서 로한이나 곤도르의 대안으로서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반지의 전쟁을 마치자 우리의 닭셰프 님은 같.놀.다 사람들을 위해 특별한 음식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버섯과 호박, 죽순으로 튀김을 만들어 오셨는데 맛있어서 술 생각이 절로 나더라고요. 제 옆에는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히미끼 님이... (사스가 같.놀.다의 정신!)
야식을 먹고 나서 마지막으로 스페이스 얼럿을 또 했습니다. 저와 히미끼 님까지 포함해서 5인으로요. 처음 하는 분도 있어서 튜토리얼부터 시작해서 총 6게임을 했는데요. 새벽 5시까지 했다는... (경보! 잠이 부족합니다...;;;)
같.놀.다 이야기는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