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초에 있는 황금 연휴에 맞춰서 일주일 정도 되는 휴가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지난 번에 반지의 전쟁 맵 천출력을 하면서 몇몇 분들에게 약속했던 방문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는 연휴에는 여러 지역을 가서 사람들도 만나보고 게임도 함께 하려는 더 큰 계획을 세우게 됐습니다. "뜻밖의 방문" 2부부터 10부까지는 이번 남부지역 순회방문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전하겠습니다.
여수 밤바다 이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 네게 들려주고파
전활 걸어 뭐하고 있냐고 나는 지금 여수 밤바다 여수 밤바다...
전라남도 여수에 계시는 (보드게임 커뮤니티 닉네임) 벤더 님과는 지난 반지의 전쟁 맵 천출력 프로젝트 때에 이메일로 얘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주로 모 보드게임 커뮤니티의 중고장터에서 자주 본 (?) 그분을 이번 기회에 실제로 만나서 반지의 전쟁 규칙도 알려드리고, 여수와 순천, 광양의 보드게임 모임분들과 함께 게임을 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번 남부지역 순회방문은 6월 1일부터 시작하려고 했으나 여수 모임 분들의 일정이 5월 31일에만 가능하시다는 연락을 받아서 하루 앞당겨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5월 30일 오전에만 하더라도 넉넉했던 5월 31일자 기차표가 오후에 거의 매진되면서 저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습니다. 역에서 입석표가 남아 있었지만 4시간 가까이 걸리는 여수까지 서서 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제게 남은 선택지는 5월 30일 밤 11시 경에 출발하는 여수 EXPO행 마지막 열차.
31일 토요일 새벽 3시 40분 경에 여천역 도착 예정이었던 기차는 15분 정도 연착되어서 4시에 도착했습니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여천은 여수에 있는 역 이름입니다. 저도 이번에 알게 되었네요. 벤더 님께 새벽에 도착한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아서 버스가 다닐 시간까지 작은 역 대합실에서 기다리려고 했습니다...만 기차를 타고 오면서 계속 배가 고팠기 때문에 5시 즈음에 좀 이른 아침을 먹으러 역 밖으로 나갔습니다. 밖은 깜깜했고 밖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현지 분에게 들은 바로는 역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서 새벽 시간에는 택시도 기차 시간 즈음에만 온다고 합니다.) 다행히 첫 기차가 올 시간이어서 밖에 택식 몇 대가 와서 승객들을 내려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택시 기사님께 당당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침 먹을 수 있는 곳으로 가주세요!"
10분 정도 되는 짧은 시간 동안 택시 기사님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방인이 여행을 와서 물어보는 가장 흔한 질문을 하나 드렸습니다.
"기사님, 여수에서 뭐가 제일 맛있어요?"
"그런 거 없어요. (어딜 가나) 다~ 똑같아요. 아무거나 드세요."
택시 기사님과 낄낄거리면서 나눈 그 대화는 이번 남부지역 순회방문에서 저에게 아주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대합실에서 한 시간 가량 기다리면서 관광안내서에서 여수 10대 음식을 찾아보고 있던 제가 부끄러워졌습니다. 택시 기사님은 아침에 문을 연 곳이 별로 없을 거라면서 24시간 영업하는 콩나물 국밥집에 데려다 주셨습니다. (실제로 새벽에 문을 연 가게가 거의 없었습니다.)
벽에 걸린 메뉴판을 스윽 한 번 바라보고 아주 이방인스럽게 주문을 했습니다.
"사장님, 콩나물 국밥 하나 주세요!"
"무슨 맛으로요?"
맛이 한 가지가 아니었던 겁니다. 일단 아침부터 알싸한 음식에 도전했습니다. SNS 자랑질 허세에 찌든 사람처럼 식사 전에 인증샷부터 찍었습니다. 여수에서 맛본 6,000원짜리 콩나물 국밥 퀄리티입니다. 뜨끈한 철 그릇에 흰자위가 살짝 익은 날계란을 하나 주셨네요. 조미김도 2개나.
아침을 먹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직 아침 7시.
'그냥 걷자...'
관광안내서의 지도를 보면서 도심일 것 같은 곳을 향해서 계속 걸어갔습니다. 지도를 거꾸로 보다가 오동도로 갈 뻔 한 것은 비밀.
8시 경에 드디어 (용기를 내서) 벤더 님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두 번째 만에 전화를 받으셨는데 아직 잠이 덜 깨신 목소리로 여수 모임 분들이 모일 장소를 알려주셨습니다. (나중에 만나서 말씀해 주셨는데, 저한테서 Nations 네이션즈 배우시려고 게임 펀칭하시고 늦게 주무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또 걸었습니다. 차를 타고 가기엔 너무 가까워 보였거든요.
모임 장소는 여수의 모 병원 맞은편에 위치한 2층짜리 천사 다방 (?)이었습니다. 카페가 굉장히 넓고, 단체석용 대형 테이블이 무려 3개나 있어서 보드게이머들에게 최적의 장소로 보였습니다. 9시 경에 벤더 님이 오셔서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오시기로 한 다른 분들을 기다리면서 보드게이머들스러운 얘기를 나눴습니다.
벤더 님은 오랫동안 보드게임을 해오신 분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러하듯이, 2000년대 초반 보드게임 카페가 많았던 시절에 보드게임을 접하시다가 오랫동안 잊고 지내셨고 L 모 대형 마트에서 Puerto Rico 푸에르토 리코 한글판이 60% 할인 중인 것을 보고
두 분이 더 오셔서 반지의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저까지 4명이었는데, 저는 게임을 전체적으로 봐 드리기 위해서 게임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고, 한 분이 자유민족을 나머지 두 분이 암흑군단을 맡았습니다. 규칙서에서 3-4인용 규칙이 있지만 저의 경험 상 반지의 전쟁을 처음 배울 때에는 2인 규칙으로 하고 같은 팀원들이 서로 상의를 하면서 진행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아서 2인 규칙으로 진행했습니다.
반지의 전쟁을 처음 할 때에 오래 걸리는 부분은 카드 텍스트를 읽는 시간과 카드가 언급하는 지역을 찾는 시간입니다. 게임 시작 전에 게임 보드에 피규어를 놓는 것도 시간이 좀 필요한데 이번에 반지의 전쟁 맵 천출력할 때에 제가 이미지를 약간 편집해서 피규어를 놓아야 하는 각 지역에 세 개의 숫자로 된 피규어 개수들을 적어넣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지역에 "A/B/C"라고 적혀 있다면 "A"개의 정규 부대, "B"개의 정예 부대, "C"개의 지도자 또는 나즈굴을 배치하면 됩니다. 천출력 맵에 직접 적혀 있어서 규칙서를 뒤적거릴 필요가 없죠.
오전 10시 즈음에 규칙 설명부터 시작된 반지의 전쟁은 오후 2시가 넘어서 끝났던 것 같습니다. 암흑군단이 군사로 승리했습니다. 아무래도 반지의 전쟁을 처음 할 때에 암흑군단이 더 쉽게 다가옵니다. 원정대를 보내고 관리해야 하는 부담이 있는 자유민족은 기억해야 할 규칙이 훨씬 더 많고 행동 주사위 개수 차이에 대한 압박이 있어서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자유민족 플레이어라면 행동 주사위를 빨리 늘리는 방법을 반드시 생각해내야 합니다.
게임을 끝내시고 보이신 반응은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고 재미있다"였습니다. 48쪽짜리 규칙서를 읽어서 다 익히려면 읽다가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미 할 줄 아는 사람이 앞에서 정리해서 설명을 해주면 게임의 구조를 파악하기가 더 쉬워지죠. 다음엔 여수 모임 분들끼리 해보시겠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혹시라도 진행 중 모르는 부분이 생기면 언제라도 저한테 물어보세요.
그 다음에 근처 김밥 전문점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다른 게임들을 이어서 해봤습니다. 모임마다 모임을 주도하는 사람이라든지 모임 분위기가 달라서 모임에서 하는 게임들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모임의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여수 모임에서는 여러 명이 함께 할 수 있는 마피아 류 게임과 카드 게임 등을 자주 하신다고 합니다. 이날도 몇몇 분들이 더 오셔서 Wooolf! 울프!와 Mai-Star 마이스타, The Boss 더 보스, Blood Bound 블러드 바운드, The Resistance: Avalon 더 레지스탕스: 아발론, One Night Ultimate Werewolf 원 나잇 얼티밋 웨어울프 등을 했습니다. 울프!와 마이스타 등은 제목만 들어보고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날 여수 분들에게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 인기몰이 중인 Machi Koro 마치 코로 (한국어 제목으로 미니 빌)도 여기서 처음 해봤네요.
제가 알려드리려고 준비해 간 게임들이 더 있었으나
어느 새 창밖에 해가 떠 있었습니다. 5월 31일 오전 9시부터 6월 1일 오전 8시까지 연속 23시간 동안 게임과 커피, 수다를 즐긴 여수 모임 방문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왜 노예 12년이 떠오르는지... ㅠㅠ
여천 역에서 전주로 갈 기차를 기다리며 벤더 님과 얘기를 나누면서 알게 됐는데, 여천 역에서 차로 10여 분만 가면 바다가 나온다고 합니다! 이번 방문에서는 시간이 하루뿐이어서 여수 밤바다가 아닌 여수 밤다방만 봤는데, 다음에는 남해를 내려다 보고 싶네요. 옆집에 사는 이웃처럼 편안하고 즐겁게 잘 대해주셔서 다음에 또 방문하려고 합니다. 정말 즐거웠습니다! 끝으로, 여러 모로 이번 방문을 도와주신 벤더 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