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인에서 온라인 게임을 하다
목욕탕에서 씻고 아마 저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고 있던 것 같았습니다. 제 짐작으로 전주고속터미널까지 택시를 타고 가서 버스로 바꿔타고 또 광주에서 모임 장소까지 가려면 약 3시간이 필요해 보였습니다. 붉어진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갔습니다. 날씨는 여전히 더웠고 가방과 주머니를 메고 나다니기에는 절대 좋은 날씨는 아니었습니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에 30분 정도 기다리면 광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습니다. 대합실 의자에 앉았습니다. 더위와 잠의 공격을 받아내면서 말이죠. 어쨌거나 버스를 탔고 그 다음은 기억나질 않습니다.
광주는 저의 연고지가 아니어서 이번에 처음으로 광주 땅을 밟아봤습니다. 대도시답게 크고 번쩍번쩍한 터미널 안에서 제 눈은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모임 시간이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아서 일단 밖으로, 그리고 빨리 지하철 역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터미널 바깥도 혼잡했습니다. 한낮에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와 부족한 수면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졌죠. 어지간하면 짐이 많아도 지하철 역까지 걸어가겠는데 저도 포기를 하고 말았습니다. 일단 터미널 뒷편으로 돌아가서 무작정 택시를 붙잡고 탔습니다. 택시 기사님께 목적지를 말씀 드렸는데 잘 못알아 들으셨는지,
"으디요이?"
라며 구수한 전남사투리로 물어보셨습니다. 기사님이 차 온도계를 보여주시면서 밖의 온도가 37도임을 알려주셨습니다. 터미널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까지의 거리는 약 1.2km. 만약 걸어서 갔다면...?
오후 2시가 조금 안 된 시각에 상무 역 근처에서 내렸습니다. 주변을 훑어보니 건너편에 새로 지은 것 같은 건물 9층에 모임 장소가 보였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이미 동호회 사람들로 보이는 몇몇 분들이 게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회원들 구성이 어땠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제가 있던 그룹에는 숙련자보다 신입회원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저까지 5명이었는데 할 게임을 고르지 못하자 게임 진열장을 직접 보면서 제가 몇 가지를 꼽아 드렸습니다. Ra 라 , Modern Art 모던 아트, Notre Dame 노트르 담 등을요. 아마도 익숙하게 들리는 제목 때문인지 몰라도 노트르 담이 선택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신입회원들이 "라"를 하는 게 더 좋았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전날 전주 같.놀.가의 어린 회원들에게 설명해주고 꾹꾹 밟히고 나서 이날 노트르 담 할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운명은 참 얄궂네요. 이날도 이 게임을 설명할 사람이 저 말고 없어서 제가 설명을 맡았습니다. 평소에 설명하거나 게임할 때에 개드립을 참 많이 던지는데, 이날은 제가 많이 피곤했는지 제 설명이 좀 딱딱했던 것 같습니다.
제 왼쪽에 계셨던 분은 순창에서 오신 분이었는데, 제가 드린 초반에 점수 욕심 내면 전염병으로 탈탈 털린다는 조언을 한쪽으로 흘리셔서 중반부터 영향력 큐브와 승점 토큰을 토해내기 시작하셨습니다. 저는 고용 카드의 능력을 잘 맞춰갔고 성당 보너스 점수를 챙겨 먹었습니다. 중반부터 공원에 모인 큐브 덕에 점수를 얻을 때마다 추가 승점 토큰도 모았습니다. C세트에서 성당에 못 들어가서 살짝 꼬였지만 공원으로 꾸준히 모은 추가 승점 덕분에 무난하게 이겼죠.
그 다음에 8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The Resistance: Avalon 레지스탕스: 아발론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모임에서는 사람들이 많을 때에 아발론보다는 7 Wonders 7 원더스를 하는 편입니다. 게이머 성향이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누군가를 이유없이 몰아가는 것보다 각자 합리적인 판단으로 동시에 진행하는 게 훨씬 더 좋다고 판단해서 그렇습니다. 어쨌거나 보드리아 모임 사람들 다수의 선택에 의해 레지스탕스: 아발론이 선택이 되었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제 왼쪽 두 사람까지 연속으로 3사람이 악의 편이었습니다. 한 남자 회원이 진행을 주도하며 첫 번째 원정에서 성공을 이끕니다. (첫 번째 원정 도중에 제 왼쪽 분이 성공을 냈는데 선의 편 중 누군가가 실수로 실패를 내는 바람에 제 왼쪽 분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얘기를 꺼내면서 반정도 커밍아웃을 한 상태였습니다. 저와 다른 악의 편인 여자 회원 (구분을 위해 '흰옷여성'이라 부르겠습니다)이 그냥 진행하자고 해서 덮고 넘어갔습니다.) 두 번째 원정에는 제가 포함이 됐는데 실패가 나오면서 저를 의심하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A, B, C)일 때에는 성공이었고, (A, B, C, D)일 때 실패였으니까 D가 악의 편이다"는 많은 사람들이 빠지는 논리적인 오류입니다. A, B, C 모두가 선의 편이라는 전제조건 하에 D가 악의 편이라는 게 성립되는 것이죠. (제가 악인 것은 맞았지만) 저를 악의 편으로 의심한다는 분께 이 말로써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세 번째 원정을 앞두고 제가 리더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원정 후에 저를 의심하던 분이 리더를 다음으로 넘겨야 한다며 강하게 어필을 했고, 저는 역으로 멀린인지 아닌지 시험하기 위해서 외려 칼자루를 그 분께 넘겼습니다.
"제가 아직 파악이 덜 되어서 그런데, 원정에 참가시키고 싶은 분을 찍어주세요. 제가 참고해서 정할게요."
8명 중에서 선의 편 5명을 정확하게 찍는다면 멀린인 사람을 찾아내 암살할 확률이 올라갈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실패를 이끌어낸 그 분을 악의 편으로 몰아갈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 분은 정확하게 악의 편 3명을 뺀 나머지 사람들을 지목했고, 저는 기꺼이 그 인원으로 원정을 꾸리고 성공을 얻어냈습니다. 저는 멀린으로 확실시되는 그 분께 자신있게
"저 약속지켰습니다."
라고 말하며 다른 분들로부터 신뢰를 얻어냈죠. 그 때문에 네 번째 원정에 제가 포함되었고 악의 편 2명이 포함된 원정을 실패로 만듭니다. 5번째 원정에서 제가 포함되는 바람에 원정이 실패가 되었고, 결국 악의 편이 승리했습니다. (멀린이었던 분들 확실하게 알고 있어서 멀린 암살로 역전승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레지스탕스: 아발론 이후에 남은 4명이서 할 게임을 고르기 위해서 노트르 담을 같이 했던 여자 분 (검은옷 여성)께 선택권을 드렸습니다. 그러더니 대뜸 Puerto Rico 푸에르토 리코를 선택하시더군요. (다른 그룹에서 게임을 하시려던 흰옷 여성분이 계속 "푸에르토 리코"를 입에 달고 계셨는데, 이 모임을 우연히 다녀간 제 지인으로부터 농담삼아 그 분과의 푸에르토 리코를 피하라는 권고를 들은 상태라...) 신입회원으로 보이는 분 두 분은 아예 모르시고, 기존회원인 것 같은 분은 예전에 해봤고 영어판이라 잘 모르겠다고 하셔서 제가 또 설명을 했습니다. 노트르 담에서 제가 드린 팁을 흘리신 순창에서 오신 남자 분은 제가 드린 팁을 또 흘리시고 '그냥 해볼게요' 플레이를 했습니다. 본인이 하고 싶은 방식으로 진행하는 게 맞는 것이긴 한데, 나비효과를 크게 일으키는 게임에서는 누군가의 플레이에 의해서 다른 누군가가 반사이익을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그런 게 좀 걱정되었습니다. 이 게임은 푸에르토 리코였으니까요. 게임이 끝나고 점수를 확인해 보니 1점차로 겨우 승리했습니다. 이 게임을 고르신 여자 분이 그날 처음했는데 2등을 하셔습니다. (게임이 끝나고 그 여자 분께 게임을 고른 이유를 여쭤보니 그냥 박스가 예뻐서라고... 아주 잘 고르셨습니다. ㅎㅎ)
제가 가져간 게임들 중에서 War of the Ring 반지의 전쟁이 살짝 언급이 되었습니다만 흰옷여성이 광주에서 대여섯 분이 이미 할줄 안다는 말씀을 하셔서 할 게임 목록에서 제거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 시간에 반지의 전쟁을 반드시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다른 게임을 보다가 Dungeon Petz 던전 페츠를 진행했습니다. 딱히 기억나는 상황이 없어서 패스.
잠이 너무 부족해서 제 심신에서 피로가 폭발하고 있었습니다. Dead of Winter: A Crossroads Game 데드 오브 윈터: 갈림길 게임을 꺼내서 셋업하고 계셨는데, 요새 화제의 게임이라 어지간하면 그냥 하고 싶었지만 이미 제가 좀비가 된 것처럼 몸을 가누기 힘들어서 쉬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위를 보니 모임에 오신 분들 중에서 다수가 빠져나간 상태였고, 저도 배가 고파서 대학생 한 분과 저녁식사를 하러 나갔습니다. 상무 역 주변에 식사를 할 만한 곳이 없어서 꽤 돌아다녔는데, 아울렛 건물 안에 있는 패스트푸드 점에서 끼니를 해결했습니다. 식사 도중에 반지의 전쟁 얘기가 살짝 나왔는데, 시간도 꽤 늦었고 보드리아 모임에서 더 이상 배우려는 분이 없어서 제 마음을 살짝 내려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회원이 설명만이라도 들어보고 싶다고 해서 식사를 마치고 올라가서 설명해 드리겠다고 했죠.
모임 장소에는 이제 대여섯 회원 분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천출력 맵을 꺼내서 피규어와 카운터들을 놓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반지의 전쟁을 하신 분들은 아시겠습니다만, 제가 반지의 전쟁을 설명하거나 진행하면서 졸거나 정신줄을 놓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날은 제 기억으로, 설명 중간중간에 mute 뮤트 구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몇십 초나 몇 분 정도 설명이 끊기다가 제가 정신을 다시 차리고 계속 이어서 설명한 게 여러 번이었던 것 같습니다. 설명을 마치자 밤 11시 정도 되었습니다. 모임 장소가 11시 30분에 마감한다는 것 같아서 빠르게 30분 정도 진행하고 마치기로 했죠.
이날 광주 보드리아에서 가장 좋으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이 분과의 게임이 너무 짧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게임의 감을 빨리 잡으셔서 숙련자처럼 불필요한 장고 없이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가게 사장님의 배려로 50분 가량 진행하고 우리가 자발적으로 중단했는데 계속했다면 30-40분 내에 게임이 끝날 것 같았습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 반지의 전쟁보다 예정보다 늦게 귀가하게 된 그 회원 분께 미안했지만 (끝까지 못했지만) 반지의 전쟁이 재미있었다고 말씀해 주셔서 참 고마웠습니다.
모임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 또 모임 날의 여건에 따라 제가 모임의 일부분만 보고 잘못된 판단을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처음으로 방문한 광주 여정에 대해, 제 개인적으로 많은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제가 준비해 간 게임을 마음껏 설명할 수도 없었음을 제쳐 두고, 모임 회원들과 대화를 나눌 시간도 별로 없었고 식사도 같이 못했기 때문인데요. 제가 피곤해서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는데, 다들 여유 없이 좀 뭔가에 좇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온라인 게임과 달리, 우리가 보드게임을 하면서 좋은 느낌을 갖는 것은 내가 얼굴을 마주하는 상대를 '사람'으로 인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단순히 '상대가 입장했습니다', '게임이 시작됐습니다', '게임이 종료됐습니다', '상대가 퇴장했습니다'의 텍스트가 모니터에 나오고 신호에 따라 플레이어들이 반응적으로 플레이하는 것이 아니라,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어디에서 왔고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를 물어보기도 하고 같이 식사 (+ 술)을 권하며 다음에 또 만날 것을 기약하는 게 사람이 모인 '모임'의 본 가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순창이나 목포 등 꽤 먼 곳에서 온 사람들에게 '왜 광주까지 왔느냐'고 질문을 하자 돌아오는 답이 "모임이 없어서..."였습니다. 모임의 경쟁력이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이나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게임이 아니라, 모임 외적인 지리적 이점 때문이라면 나중에 생길 수도 있는 다른 모임에 대해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좋은 모임의 조건은 무엇인가요?
덧붙이는 말 8월 10일 보드라이프에 본 글을 게시한 후에 광주 모임 분들이 댓글과 쪽지를 통해서 광주 모임의 사정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이동 시간이 꽤 걸리는 전남 분들도 광주로 와서 모임 활동을 하고 계시고, 같은 광주 지역이더라도 상무 역 주변까지의 교통이 불편해서 어려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제한된 모임 시간 동안에 최대한 많은 게임을 하고 싶은 회원들이 식사나 다른 수다로 인해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을 하지 않다 보니 현재 광주 모임만의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광주 모임의 주변 여건이 개선되어서 앞으로 광주 모임 분들이 더 편한 환경에서 모임 활동을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
다음 삼시세겜은 전라남도 여수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