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 액세서리의 미래는?

3년 전에는 "뜻밖의 방문"이라는 이름으로, 2년 전에는 "삼시세겜"이라는 이름으로 남부지역 순회방문을 했습니다. 작년에도 이 프로젝트를 할 생각은 있었지만 제게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삼시세겜 때에 저와 몇몇 모임 사이에 마찰음이 있었고, 작년에 제가 새로운 모임을 만든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여서 무리하지 않기로 했죠. 2017년이 되자 제 모임도 안전 궤도에 올랐고, 겨울부터 9개월 이상 붙잡고 있던 번역도 슬슬 끝날 기미가 보이자 제 스스로에게 '휴가'라는 것을 주고 싶었습니다. 매일 밤 모니터를 바라보며 번역을 다듬던 것을 제 눈 앞에서 치우고 싶었던 것이죠. 반가운 사람들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얘기도 하고 게임도 하던 때가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2년 만에 남부지역 순회방문 프로그램을 재개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달에 해외구매로 게임을 몇 개 구입했더니 예산이 넉넉치 않아서 일정을 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복절까지 징검다리로 이어지는 둘째 주말 단 이틀. 예전에 "반지의 전쟁" 글에서 부산에 와달라는 댓글이 기억나서 부산에서 배우실 분을 찾았습니다. 보매보매 님 한 분만 신청을 하셔서 퇴근하신 시간 이후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토요일 낮부터 저녁 시간까지 무얼 할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얼마 전에 보드라이프에서 보드게임 오거나이저를 제작해서 판매하는 글이 기억났습니다. 블로그를 찾아가서 위치를 보니 마침 부산이더군요. 게다가 부산역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블로그에 있던 이메일 주소로 견학을 희망한다고 메일 한 통을 보냈더니 바로 다음 날 답장이 왔습니다. 게다가 토요일에는 그곳에서 보드게임 모임도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러브 레터부터 1846까지 두루두루 한다는 말씀에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지만요...;;;


금요일 퇴근 후에 짐을 꾸렸습니다. 가방에 옷이랑 수건, 게임 등을 넣었습니다. 몇 시간이라도 자려고 누웠지만 소풍 전날의 초딩처럼 잠이 오지 않더군요. 시계를 보니 어느덧 5시 반. 씻고 기차역으로 출발했습니다. 역 대합실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편의점에서 구입한 샌드위치와 생수로 아침식사를 해결했습니다. 7시가 조금 넘자 드디어 부산행 열차가 들어왔습니다. 다행히 열차 안에 이런 분들은 안 계신 것 같았습니다.



꽤 긴 시간 동안 잠 들었습니다. 귀에 사람들이 내는 말소리가 들렸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경상도 어르신들 소리가 많이 들려서 '아, 거의 다 왔나 보다...'라고 생각했죠. 10여 분 연착되어 12시가 넘어서 부산역에 도착했습니다. 마지막 여름 휴가를 보내려는 많은 사람들이 열차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저도 그 중에 하나였고요. 배가 고팠습니다. 하지만 제가 미리 짜 놓은 일정표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했습니다.



부산역에서 밖으로 나오면 바로 도시철도역이 있습니다. 부산1호선을 타고 괴정역에서 내려 마침내 '캄바오공방'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1층에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도착했을 때에 저를 맞이해 준 것은 다름 아닌 고양이였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맞이해 준 건 아니고 제 앞을 막고 있었죠;;; 고양이 목줄에 '테리'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드러누워 있는 테리를 지나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는 작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열린 문 틈 사이로 테리가 앞장섰습니다.


사무실 안에서 다섯 분이 게임을 하고 계셨습니다. 인사를 나누고 옆에서 게임하시는 것을 구경했습니다. 하시던 게임은 Compounded 컴파운디드. 화학적 혼합물을 만드는 게임이라고 하셨습니다. 플레이어들이 주머니에서 원소들을 뽑아서 서로 교환하고, 특정 원소들을 요구하는 혼합물에 자신의 원소들을 올려놓고 미션을 완수하는 식으로 진행된다고 합니다. 과학을 소재로 한 게임 몇 가지가 있죠? 생물에 대해서는 Evolution 에볼루션, 지구과학이나 우주는 Terraforming Mars 테라포밍 마스가 떠오르는데, 앞으로 화학 하면 컴파운디드가 떠오를 것 같네요.



저를 기다리시느라 다들 점심식사를 못 하셔서 같이 식사를 하러 나갔습니다. 어딜 가든지 메뉴 정하는 게 가장 어렵죠.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에 국수집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걸어가는 동안에 캄바오공방 주인이신 욱일 님과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그게 가장 궁금했습니다. 보드게임 취미와 공방 일 중 어떤 걸 먼저 시작하셨을지가요. 원래는 가구 만드는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보드게임을 접하시게 되었고, 가구 주문이 없을 때에 기계들로 보드게임과 관련된 것을 만들 것을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제가 2년 만에 남부지역 순회방문을 하면서 그 2년 사이에 보드게임 계에서 크게 바뀐 것 중에 하나가 보드게임 액세서리 시장이 커진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생각해 보시면 2년 전만 해도 오거나이저나 트레이, 메탈 코인 같은 것을 소수만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근래에 갑자기 대두된 현상이죠. 저는 게임 액세서리를 추구하는 게이머들의 등장이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원래 전통적으로 게임을 깊게 파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같은 게임을 수백 번 플레이하면서 전략 대결을 좇는 '플레이어'들이죠. 그러다가 2000년으로 넘어오면서 보드게임 디자이너들이 폭발적으로 늘고 그에 따라 출시되는 게임의 수도 점점 늘어났습니다. 그러면서 게임을 수집하는 '컬렉터'들이 나타났죠. 이들이 수집하는 것은 몇십 개 수준이 아닙니다. 수백 개부터 수천 개에 이르죠.

'플레이어'들은 소유욕이 별로 없습니다. 보드게임 커뮤니티에서 컬렉터들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어서 그렇지, 보드게임 모임에서 게임을 구입하지 않고 모임에 지속적으로 참가하는 회원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들은 게임하는 것 자체를 즐깁니다. '컬렉터'들은 자의나 타의로 수집합니다. 집에 넓은 공간이 있고 재력도 뒷받침되는 분들은 자연스레 컬렉터의 길을 가게 됩니다. 해외구매가 쉬워짐에 따라 해외에서 직접적으로 게임 구입하는 분들은 배송비의 부담을 줄이면서 관세 부과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 $200를 초과하지 않도록 구입합니다. 한 번 주문을 넣을 때에 금액을 맞춰야 해서 불필요한 게임도 넣게 되죠. 주문 넣는 횟수가 많아지면 게임은 쌓이게 되고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해보지 못한 게임들이 점점 쌓이게 됩니다. 자신이 원치는 않았지만 컬렉터가 된 거죠.

이 두 부류와 비교하면, 액세서리를 구입하는 탐미주의자(耽美主義者)는 이질적입니다. 소유욕이 있지만 그것이 게임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보조하는 액세서리에 향해 있으니까요. 액세서리는 보드게임의 발전에 따라 자연스레 발생했습니다. TCG (Trading Card Game)가 생기면서 카드 슬리브와 프로모가 보드게임 계로 흘러들어왔고, Carcassonne 카르카손이 사람 모양의 마커, Meeple 미플을 도입하면서 게이머들에게 새로운 욕구를 심어주었습니다. 최근 들어, 테마틱 게임이 정교하고 세련되게 바뀌면서 보드게임긱 상위 랭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테마틱 게임은 게이머들을 홀리는 훌륭한 스토리와 몰입감을 높여 주는 구성물이 핵심입니다. 다양한 카드, 토큰, 피규어들을 한눈에 보이도록 깔끔하게 보관할 수 있는 저장용기에 대한 수요가 높아짐에 따라 오거나이저나 트레이의 판매도 증가하고 있죠.

그리고 제가 최근에 겪은 바에 의하면 테마틱 게임 때문에 보드게임을 시작한 분들이 꽤 많습니다. 그러니까 게임의 규칙만 옆에서 잘 잡아준다면 테마틱 게임으로 비(非)보드게이머를 보드게임 계로 끌어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게이머가 아닌 사람들은 복잡한 메커니즘이나 전략의 맛보다는, 게임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을 즐깁니다. 어쩌면 게임 내의 단순한 구성물을 예쁜 것으로 대체하는 분들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도 있지만 새로운 분들을 보드게임 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로 대체 컴포넌트를 사용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음식을 예쁜 용기에 담고 예쁜 수저로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면 손님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 테니까요.

저는 액세서리에 거의 투자하지 않는 편입니다. 제 집에 있는 게임이 (기본판만) 100개가 넘어가지만 제가 좋아하는 상위 몇 개의 게임의 플레이 횟수를 늘리는 데에 더 열중합니다. 전략을 연구해서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플레이를 하는 것을 찾죠. 게임을 수집하기도 합니다. 보드게임 취미를 10년 넘게 해서 알레아 게임은 이유 없이 모으고 있죠. 그래서 저는 플레이어와 컬렉터의 가운데에 있는데, 플레이어 쪽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제가 산 액세서리라고는 Codenames 코드네임즈와 Mage Knight: The Board Game 메이지 나이트: 보드 게임 것밖에 없습니다. 아, 반지의 전쟁 거점 피규어 세트가 있긴 하네요. (이건 좀 값이 나갑니다. ㅎㅎ) 저 같은 사람은 액세서리의 생산자, 판매자들에게 있어 미개척 시장일 것입니다. 앞으로는 3D 프린터나 레이저 절단기 등을 통하여 집에서 손수 제작하거나 판매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겠죠. 카르카손이 일으킨 작은 날개짓이 보드게임 계에서 점점 커져가는 폭풍이 되었습니다. 정말로요.


제 뇌 속 망상은 끝이 나고, 걸어서 도착한 국수집의 메뉴의 가격을 보자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멸치국수가 2,500원이라니... 곱배기 해도 3,000원? 와, 이거 실화인가요?!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다시 캄바오공방으로 향했습니다. 오전부터 모이신 분들도 있었고 각자 주말 일정이 있으셔서 게임을 오랫동안 할 수는 없었습니다. 짧은 게임들 위주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첫 번째 게임은 Skull King 스컬 킹.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에서 비정상적으로 핫한 게임이죠. 이날 카드가 굉장한 텃세를 부렸습니다. 외지인에게 이렇게 가혹할 줄이야. 흥선대원군 급이었습니다. 제가 위저드 같은 트릭-테이킹 게임에서 약하지 않은 편인데, 이날 거의 맞추지 못했고 핸드에 카드가 굉장히 애매하게 들어와서 '0'을 부를 수도 없었습니다. 다른 분들 손에는 특수 카드가 잘만 들어가던데... 설마 제가 타짜들 사이에 앉은 건 아니었겠죠? 저쪽에서 바둑이나 둬야 할 삼촌이었는데 제가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ㅠㅠ 3번인가 성공해서 겨우 70점이었습니다.


두 분이 먼저 가시고, 제가 가져간 게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는데 Hansa Teutonica 한자 토이토니카로 결정되었습니다. 모르시는 분이 계셔서 제가 설명을 드렸습니다. 공평하게 시작 플레이어를 정했는데, 제가 세 번째였을 겁니다. 두 번째 플레이어셨던 분이 첫 라운드에 (제 기준으로) 살짝 실수를 하셔서 제가 좋은 자리를 잡았습니다. 4-5인 맵에서는 Göttingen 괴팅겐에 연결된 무역로가 Quedlinburg 크베들린부르크뿐만 아니라 Warburg 바르부르크도 있는데요. 턴 순서가 빠른 두 플레이어가 각자 한 무역로에 2개를 놓아야 편한데, 두 번째 플레이어 분이 마커를 두 무역로에 갈라서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두 번째로 3액션을 빨리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4액션을 가장 먼저 찍고, 다른 분들은 다른 기술들을 개발하셨습니다. 저는 4액션을 찍고 그 다음에 괴팅겐에 영업소를 설치했습니다. 나중에 Hamburg 함부르크에도 영업소를 놓았습니다. 제 영업소들의 자리가 좋아서 점수가 계속 올라갔습니다. 대신에 저는 기술 개발이 좀 더뎠습니다. 중반부터 저는 동서 네트워크를 준비했는데, 디스크가 부족해서 책 기술을 개발하느라 시간이 조금 더 소비되었습니다. 제가 게임을 끝낼 때 즈음에 두 번째 플레이어 분이 쾰른 테이블 러시를 하셨습니다. 시간을 더 드리면 질 것 같아서 마지막 턴에 제가 영업소 순서 바꾸는 보너스 마커를 쓰면서 동서 네트워크를 연결하고 게임을 끝냈습니다. 점수 계산을 해보니 제가 두 번째 플레이어 분에게 3점 뒤쳐져서 2등을 했네요. 제가 마지막 턴에 영업소 순서 바꾸는 보너스 마커를 두 번째 분의 것과 바꾸는 데에 썼으면 공동 1등으로 끝나는 거였는데, 제가 계산을 꼼꼼히 하지 못했습니다. ㅠ



세 번째로 Dokmus 도크무스를 했습니다. 이름만 들어보고 실제 게임은 처음 봤습니다. 박스가 매우 커서 어려운 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과대포장...;;; 안이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이게 전주 같.놀.가에서 왔을 거라고 하셨는데요. 같이 해보고 나니까 곧 캄바오공방에서도 방출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도서관 대출 대장처럼 목록을 만들어서 이 도크무스가 전국팔도의 보드게임 모임을 돌게 하는 게 어떻냐고 쓸데 없는 의견을 내 봤습니다. 그림만 보면 아랍 쪽 같은데, 아무튼 뭐 무슨 도크무스라는 섬이 있고, 도크무스라는 신이 있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요... Citadels 시타델처럼 하는 추상전략 게임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야?! ㅋ) 자신의 턴에 마커 3개를 놓는데, 그 라운드를 위해 선택한 캐릭터의 도움을 받으며 진행할 수 있습니다. 캐릭터마다 턴 순서가 적혀 있는 것도 시타델과 같았습니다. 결과는 제가 꼴등. 카드만 저를 배척하는 게 아니라 마커들도...



다른 분들이 가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마지막 게임을 짧은 카드 게임으로 정했습니다.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먹고 들어가는 Parade 퍼레이드. 저는 이 게임하고 잘 안 맞는 것 같습니다. 뭐랄까... 어디가 재미있는 부분인지 잘 모르겠어요. 하자고 하면 하는데 제가 먼저 하자고 하지 않는 게임. 그 정도. 저는 열심히 먹었습니다. 그냥 먹은 건 아니고 철저한 계산 하에 먹었습니다. 특정 색깔만 집중적으로 먹었죠. 나중에 알고 보니까 게임 종료 시에 메이저리티로 뒤집어진 카드는 장당 1점 감점이더군요. 저는 그게 1점 득점인 줄 알고 잘 먹었다고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혼동한 게임은 Geschenkt 게쉥크트가 아닐지... 다행히 2등은 했습니다. 퍼레이드... 저의 아무말 퍼레이드였네요. ㅠㅠ



모임을 마치고 나올 때에 욱일 님이 공방 내의 기계들을 보여주셨네요. 이렇게 해서 오후 6시 반 즈음에 캄바오공방 견학을 끝내고 다른 반가운 분을 만나러 출발했습니다. 아, 중요한 걸 빠뜨렸네요. 방문을 허락해 주시고 점심식사를 사 주신 욱일 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부산에서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Posted by Mounted 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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