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인상이 전부는 아니에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전주 한옥마을을 돌아봤습니다. 한옥마을은 입장료 내고 들어가는 곳이 아니고 한옥 형태로 새로 건설한 건물들이 있는 거리입니다. 차나 먹거리를 파는 곳도 있고 숙박을 할 수 있는 곳도 있고요. 일반 가정집도 있습니다. 한옥마을 넓이가 꽤 큰데 아침에 할일도 없고 해서 두 시간 정도 둘러보았습니다. 하늘에서 분무기로 물을 뿌리듯이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산을 바라보니 새벽에 머금었던 물을 뿜어내듯이 연무가 피어올랐습니다. 한 폭의 그림 같더군요.

그리고 나서 근처에 있는 목욕탕에 가서 씻고 살짝 잠을 잤는데... 일어나보니 약속시간이 살짝 지났습니다. ㅠㅠ

같이놀다가게로 후다닥 뛰어갔습니다. 이날은 전주 첫 날에 저에게서 싸인을 받으신 분과 반지의 전쟁 대결이 있었는데요. 제가 이른 아침부터 체력을 다 써서 체력 보충을 위해 같이놀다가게 안에서 잠을 잤습니다. ^^;;; 사장님과 두 분이서 이노베이션 하셨던 것 같은데...


오후 5시에 드디어 반지의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플레이로그를 적어가면서 궁서체로 했습니다. 반지의 전쟁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 궁금하신 분은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더러운 주사위빨 때문에 졌지만 가르쳐 드린지 이틀 만에 놀라운 전략과 실력을 보여주셔서 게임이 끝나고서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플레이로그를 적으니 게임 중간에 틀리게 하는 것을 바로 잡아가면서 할 수 있어서 좋더군요! 그리고 시작 시간과 종료 시간을 보니 반지의 전쟁이 3시간도 안 걸리는 주사위 굴리는 캐주얼한 게임이라는 게 증명이 됐습니다! ㅎㅎ


반지의 전쟁이 끝난 후에 가게 밖에 여자 분 세 명이 가게 안을 계속 들여다 보고 계셨습니다. 저는 관광객이겠거니 하면서 신경을 안 쓰려고 했는데, 계속 기웃거리셔서 사장님께 슬쩍 말씀을 드렸죠. 저희가 무려 3시간 가까이 가게에서 테이블 2개나 차지하고 있었는데 사장님께 죄송한 마음이 없을 수가 없었죠. 그래서 저희가 게임은 새벽에 해도 되니까 손님들한테 자리를 양보하겠다고 얘기했더니 사장님은 손사레를 치시면서 신경쓰지 말고 하던 게임 계속 하시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안 되겠다 싶어서 가게 밖으로 나갔는데 그 여자 손님들이 사장님께 밖에서라도 게임을 하겠다고 사정을 하시더군요. (저희가 잘못 했습니다, 손님들... ㅠㅠ) 그러더니 여자 손님들은 같이놀다가게 앞의 다른 가게에서 병맥주를 시켜서 더 편안한 분위기에서 게임을 즐기시는 겁니다. 청년몰의 이국적인 분위기에 보드게임이 곁들여지니 저희도 질 수 없겠다 싶어서 비싼 병맥주를 시켜서 가게 밖에서 가볍게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같이놀다가게 방문하실 분이라면 이런 낭만도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전주 모임 분들한테서 Through the Ages 쓰루 디 에이지스를 배웠습니다. 제가 몇 번 못 해봤지만 항상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게임입니다. 전주 모임 분들의 친절하지만 게임을 진행하면서 기분 탓인지 규칙이 계속 추가되는 실시간 패치...;;; 결과는 생략... ㅠ


같이놀다가게가 "공식적으로" 문을 닫을 때가 되어서 한두 분씩 귀가하셨...다가 다시 오시더니 야간 라면 타임이 시작됐습니다. 닭백숙을 해주신 분께서 라면도 맛있게 끓여주셨습니다.


식사 후에 Race for the Galaxy 레이스 포 더 갤럭시와 Dominion 도미니언에 대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닭 쉐프 (?) 님이 좋아하는 게임들 중 하나가 레이스 포 더 갤럭시인데 처음에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작스런 외계인의 계시를 받고 게임을 파악하셨다고 하네요. 저와 사장님이 도미니언 하자고 꼬시려고 했는데 자기와 안 맞는 것 같다며 거절을 하셨습니다. 사장님은 싫은 것을 정해놓지 말라고 하셨는데 쉐프 님은 싫어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며 방어를 하셨습니다.

보드게임이 점점 복잡해지고 있어서 게이머들조차도 설명이나 그림만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비해 게임에 숙달되는 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합니다. 이것은 게임의 첫인상이 플레이를 거듭함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저는 Agricola 아그리콜라에 대해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첫 플레이에서 5인 게임으로 했는데 7점을 기록했죠. ^^; (당시에 일꾼 놓기 게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그런 참사가...) 그 이후로 거의 안 하다가 주변 분들의 권유로 다시 시작했고, 아그리콜라를 이해하고 좋아하는 데에까지 거의 일 년이 더 걸렸던 것 같습니다. (사실은 제 머리가 나빠서...)

일반인들은 보드게임의 첫인상을 맹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 번에 보드게임카페 가서 해봤는데 재미없었어요. 안 할래요."라면서요. 아마 주변에 보드게임을 전파하고 있거나 보드게임 카페를 운영하시는 분들이라면 비슷한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보드게임은 자잘한 규칙 하나에도 게임의 재미가 달라지고, 심지어 같이 하는 사람들이 누구냐에 따라서 분위기가 다르기도 합니다. 물론 깊이가 매우 얕은 게임은 여러 번 해도 거기서 거기일 수 있지만 제가 위에서 말씀을 드린,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연구를 해야 하는 게임은 첫인상이 분명 달라집니다. 특정 게임이 재미없다는 사람들에게 제가 "네가 뭘 알아?!"라며 취향을 무시하려는 게 아니라, 첫인상의 함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는 겁니다. 게이머로서 저의 바람은 새로운 보드게임을 접할 때에 그래도 최소 3번 정도 해보고 나서 평가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한국 보드게임 업계 쪽에 루미큐브에 대한 전설이 있죠.) 같이놀다가게 사장님께 일반인 손님들에게 게임의 첫인상을 좋게 해야 하지 않느냐고 여쭈었는데요. 사장님도 그것을 잘 알고 계셔서 첫 게임에서 모두가 재미있게 하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하신다고 합니다. 가게 밖에서 게임하셨던 여자 손님들이 밖에서라도 놀겠다고 하셨던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겠죠. 설마 사장님이 마음에 들어서 그랬으려고요.


얘기가 끝나고 저와 반지의 전쟁을 하신 분과 도미니언을 했습니다. 제딴에 도미니언을 가르쳐드리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도미니언 기본판을 했는데, 알현실로 콤보 만들려다가 카드 셔플이 계속 꼬이면서 손에 알현실 두 장만 덩그러니... (이렇게 뽑혀나오면 그냥 져야죠, 뭐...)

도미니언 몇 판 하고 전주 모임에 불을 지른 화제의 게임인 Innovation 이노베이션을 했습니다. 사장님이 이 게임 구입하고 싶어서 국내 보드게임 쇼핑몰에서 검색해 보셨는데 모두 품절!


창밖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피로가 눈으로 스며들어오는지 눈이 따끔따금. 아침에 세탁소에 맡겨놓았던 빨래감을 찾아오는 길에 식사를 몇 번 대접해 주신 같이놀다가게 사장님께 보답으로 커피믹스를 선물로 드렸습니다. 사장님께 선물을 드리면 잘 안 받으시니까 몰래 놓고 가시거나 던져놓고 가시면 됩니다. (아! 술이 아니어서 안 받으시려고 했구나! 그랬구나!)



이번 여행에서 전주는 이틀 정도 머무를 계획을 세웠었는데 사장님이 먹을 것을 잘 챙겨주시고 모임 분들도 친근하게 잘 대해주셔서 더 오래 있었습니다. 한 전주 분이 "아, 그거 사육 당하는 거예요."라고 하셨는데 농담이 아닌 것 같은... 아무튼 다음 번에 반지의 전쟁 리매치와 이노베이션 확장 소개를 위해서 전주에 다시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저 때문에 월요일에도 못 쉬고 가게를 열어주신 히미끼 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다음 뜻밖의 방문은 부산광역시편입니다


Posted by Mounted 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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