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의 경쟁자는?

캄바오공방에서 나온 저는 다음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사실, 이때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분을 만나러 가고 싶긴 한데 들르면 다음 일정이 너무 빡빡했기 때문이었는데요. 그래도 부산까지 왔으니 한두 시간만이라도 만나뵙는 게 좋을 것 같았습니다.


괴정역에서 꽤 긴 시간 동안 도시철도를 타고 부산대역에서 내렸습니다. 젊은이들이 많은 이곳에 그분이 계시죠! 남부지역 순회방문 때마다 들렀던 다락을 운영하시는 스머프2 님. 저는 예고도 없이 불쑥, 훅 치고 들어갔습니다.
"스머프 님, 안녕하세요?"
그러자 컴퓨터 앞에 앉아 계시던 스머프2 님은 입을 떡 하니 벌리시고 2초간 정지 상태로 계셨습니다. 마치 야구동영상 (?)을 몰래 보다가 갑자기 방에 들어온 엄마를 본 표정 같은... 스머프2 님과 정답게 악수하며 인사를 나눴습니다. 제가 2년 전에 다락에 왔을 때에 스머프2 님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이러다가 잘못 되시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다행히 이번에 방문했을 때에 건강을 완전하게 회복하신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던전 안쪽 방에 감금당하고 안내를 받고 앉았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썰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2년간 어떻게 지내셨냐부터 건강하셨냐, 모임/다락은 잘 되냐 등등을요. 그런데 다락에 일가족 보드게임 손님이 오셔서 대화가 잠시 중단 되었습니다. 저는 안방에 있는 게임장을 훑어보고 있기로 했습니다. 새로운 게임들이 보였습니다. Watson & Holmes 왓슨 앤 홈즈라든지 저도 얼마 전에 재미있게 한 T.I.M.E Stories 타임 스토리즈 풀 세트 등이요.

손님들에게 게임 설명을 마치고 돌아오신 스머프2 님과 대화를 계속했습니다.
"요즈음은 추리 게임이 대세다 아입니꺼."
"아, 그런가요?"
"이게 계절별로 인기가 다른데예. 이번 여름에는 추리 게임이 많이 나갔습니더."
그러면서 스머프2 님은 얼마 전에 정말 '어렵게' 구하신 왓슨 앤 홈즈 얘기를 살짝 하셨습니다. 뭐, 자랑이신 거죠. ㅋㅋ 저는 아직 못 해본 게임인데 말입니다. 그러다가 대화는 아래쪽에 꽂혀 있는 타임 스토리즈로 넘어갔습니다.
"스머프 님, 타임 스토리즈도 손님들한테 나가나요?"
"이게 손님들한테 억수로 잘 먹힙니더. 특히 여성분들한테."
타임 스토리즈는 저희 안양 모임에서 최근에 하루에 몰아서 열 시간 가까이 플레이해봤습니다. 재미있다 말만 들어봤지 그때 처음 해보고 저희 멤버들 모두 홀딱 반했는데요. 이게 어렸을 적에 팔았던 게임 북 방식이어서 플레이어들을 몰입시키기에 좋긴 합니다. 그래도 게임이니 규칙이 있고 옆에서 누가 봐줘야 할 것 같은데 이런 게임이 비(非)보드게이머들한테 정말로 통한단 말인가요?

"어떤 일이 있었냐면, 방탈출 카페 아시죠? 손님들이 거기 예약 걸어놓고 여기 와서 기다린다는 거 아닙니꺼. 막 4시간이고 5시간이고 기다려야 해서 여기 와서 게임하면서 기다리는데예. 제가 타임 스토리즈 한 번 가르쳐 드리니까 이거 하느라 방탈출 카페에 전화해서 '저희 예약한 거 취소할게요.' 이런다는 거 아닙니꺼."
방탈출 카페는 수도권에서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번화가마다 몇 개씩 생겼습니다. 한 시간 정도 되는 시간 동안 일인당 몇만 원의 비용을 내야 함에도 추리를 좋아하는 매니아들이나 커플들이 주로 이용한다고 들었죠. 방탈출이라는 컨텐츠를 물리적인 공간에서 구현하고 인테리어비, 소품비를 뽑으려면 일정 기간 동안 그대로 유지해야 합니다. 한 번 클리어한 손님들은 다른 탈출 방을 원하기 때문에 한 가게 안에 여러 탈출 방을 만들어 두어야 하죠. 저 같은 '뼛속까지 보드게이머'인 사람의 시각에서 '아니, 뭐 저런 거에 시간 당 몇만 원을 쓰고 싶나?'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요즈음 YOLO (You only live once)가 대세이니만큼 자기가 쓰고 싶은 것에 돈이 얼마가 들든 마음 대로 쓰는 세상이긴 하죠.


아무튼 스머프2 님의 말씀은 '타임 스토리즈나 추리 게임들이 방탈출 카페의 대항마다.'라는 겁니다. 보드게이머들에게 추리 게임은 리플레이성이 매우 제한된, 두뇌의 특정 부분만 집중적으로 쓰는, 단순한 게임으로 치부될 수 있겠지만 비보드게이머들에게는 다르다는 얘기죠. 어제 제가 캄바오공방편에서 테마틱 게임을 언급했습니다. 테마틱 게임이 초보자들에게 잘 먹힌다고요. 보드게이머들이 저지르기 쉬운 잘못 중 하나가 초보자에게 새로운 게임을 소개할 때에 메커니즘 중심으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 게임은 일꾼 놓기 게임이야. 이 게임은 액션 포인트 게임이야." 이런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초보자들은 게임을 접할 때에 내가 어떤 역할이 맡아서 무슨 일을 겪게 되는지가 더 와 닿습니다. 그러니까 "이 게임은 우리가 씨 뿌리고 가축을 기르면서 농장을 운영하는 게임이야. 이 게임은 우리가 탐사대가 되어서 마야인들의 사원과 보물을 찾는 게임이야." 이렇게 접근해야 그들을 게임 테이블로 끌어당기기 쉽다는 겁니다. 게이머들이 게임을 메커니즘 중심으로 소개한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테마는 거들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게임을 깊게 파면 팔수록 (전략을 연구할수록) 껍데기인 테마는 사라지고 뼈대인 논리 부분만 남습니다. 그러면 거의 추상전략화된 거죠. 게이머들은 게임을 논리로 접근하지만 비보드게이머들은 테마로 접근하기 쉬우므로 여기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제가 10여 년 전에 서울 강남에서 보드게임 카페 일을 할 때에 당시에 같이 일하던 동료들하고 이런 망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엔 보드게임 카페의 빙하기가 올 것을 예상치 못했지만) 나중에 우리가 보드게임 카페를 차린다면 어떤 식으로 할 건가에 대해서 밤새 얘기했었죠. 저는 보드게임 카페가 하나의 놀이공원이어야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카페에 있는 각 게임은 놀이기구라고요. 우리가 디즈니랜드 같은 곳에 가면 유치하더라도 그곳에 완전히 빠져 듭니다. 일상의 스트레스는 다 잊고서 말이죠. 어린 시절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날 처음 본 사람들과도 손을 흔들며 웃고 인사를 건낼 수 있는 정신적 여유가 생깁니다. 보드게임 카페가 놀이공원으로서의 역할을 한다면 모르는 사람들과도 게임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건 제 경험입니다만 10여 년 전 당시의 여자친구와 함께 보드게임 카페를 돌아다니며 데이트를 할 때에 모르는 커플 2팀에게 함께 게임을 하자고 제안해서 Bang! 뱅!을 6인플로 한 적도 있습니다. 2인플 되는 게임을 고르면 너무 제한되니까요.)

그리고 보드게임이 놀이기구로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려면 테마가 잘 살아야 합니다. 게이머들은 경쟁을 통한 '승부'나 '승리'를 추구하는 편입니다. 우리 같은 보드게이머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 게임들을 익히고 플레이했으니 싸움 (?)을 위해 충분히 훈련된 정예 요원인 셈이죠. 그러나 초보자들은 아직 두뇌 전체를 사용하는 데에 훈련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략 게임을 하면서 몇십 분만 집중해도 머리가 아프다며 고통을 호소합니다. 네, 당연한 결과죠. 그러나 초보자들이 그런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면 꽤 긴 시간 동안 게임할 수 있습니다. 그런 고통을 잠재워줄 모르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테마'라고 봅니다. 타임 스토리즈는 클리어하는 데에 시간이 꽤 걸립니다. 운이 좋으면 더 빨리 끝나겠지만 제가 해봤을 때에 시나리오마다 3시간 이상 걸렸습니다. 스머프2 님의 다락에서 4시간 이상 타임 스토리즈에 매달렸던 손님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면 테마가 주는 뽕 또는 약기운 (?) 은 놀라움 그 자체죠. "자, 우리는 시간여행을 해서 과거의 문제를 해결해야 해. 우리는 전세계에 퍼지는 전염병으로부터 인류를 구출해야 해." 이런 식으로 어떤 상황에 처해 있고 어떤 임무가 주어졌는지를 받아들이면 초보자들도 보드게임에 더 쉽게 빠져들 거라는 겁니다. 그게 테마고요.


최근 들어서, 테마틱 게임들이 '잘'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잘'은 양(量)과 질(質) 모두 해당합니다. 많이 나오고 있기도 하고 게임성 자체에서도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0여 년 전 제가 기대했던 보드게임 카페의 역할이나 강점이 부각될 때가 드디어 온 것이죠. 앞으로도 양질의 테마틱 게임들이 더 많이 출판되어서 게이머들뿐만이 아니라 보드게임 카페를 찾는 비보드게이머들의 입맛을 사로잡아주기를 바랍니다.


오후 8시 반이 넘어서 스머프2 님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다락에서 나왔습니다. 일정이 너무 짧아서 긴 얘기를 나누지 못해서 무척이나 아쉬웠는데요. 다음 번에 부산에 갈 일이 있다면 스머프2 님과 밤새면서 먹고 마시면서 수다를 떨고 싶네요.


부산에서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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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용자 Mounted 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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