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밤 늦게까지 보드게임을 하고 지하철 막차를 타고 집에 들어갔습니다. "5분만 더! 5분만 더!"를 외치며 허니버터칩만큼 달콤한 늦잠을 자고 싶은 일요일 아침, 짐을 챙기고 도서관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오후 1시. 5학년 찬호와 4학년 정웅이만 있었고 나머지 아이들이 오지 않았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항상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던 민주가 10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아서 수업을 그낭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학년 반 5번째 게임은 Stone Age 스톤 에이지입니다. 주사위 굴리기와 일꾼 놓기 방식을 사용하는 독일식 보드게임인데요. 고학년 아이들이 일꾼 놓기를 얼마나 잘 이해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일부러 이 게임을 선택했습니다.

설명을 시작하려고 게임 보드를 딱 펼쳤는데 뜬금없이 찬호가
"선생님, 이거 구석기시대에요, 신석기시대에요?"
라고 물어보는 게 아니겠어요? 다행히 몇 달 전까지 이노베이션이라는 문명 게임에 심취해 있어서 인류역사를 좀 훑어본 기억으로
"농사를 짓는 거 보니까 신석기시대 같은데?"
라고 둘러댄 거에 가깝게 대답을 했습니다. 어른들끼리 게임을 할 때에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게임 배경인데 아이들은 이런 것에도 신경을 쓰나 봅니다.

석기 시대의 큰 규칙은 무척 쉽습니다. 네 단계 정도밖에 없고, 일꾼 놓고 주사위 굴리고 밥 먹이고 빈칸 채우고 이정도잖아요? (너무 대충 설명했나요? ㅎㅎ) 아이들도 이 게임이 쉽게 보였는지 게임 설명 도중에 자꾸만 빨리 시작하자고 했습니다. 그래도 마을 안의 건물들의 중요성과 점수를 획득하는 방법들은 한 번 더 강조하는 게 좋겠다 싶어서 좀 뜸을 들였는데 아이들의 인내심이 다 됐나 봅니다.


아이들이 둘뿐이어서 저까지 세 명이서 진행을 했죠. 제가 처음, 정웅이가 두 번째, 찬호가 세 번째였습니다. 저는 일단 농사 칸에 놨는데 아이들은 마을 건물에는 관심이 없고 돌을 캐러 나가는 게 아니겠습니까? 으잉? 문명 카드에도 관심이 없어서 저만 카드를 찜했습니다. 이러면 게임의 결과가 뻔해지는데 말이죠.

몇 라운드 진행하니까 아이들이 밥 먹이기의 압박을 느끼는지 정웅이가 먼저 농사 칸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찬호는 그래도 그냥 사냥 칸에 가서 밥을 구하고 부족하면 자원을 먹이더군요.

아이들의 진행은 단순했습니다.
마음에 드는 오두막을 정한다 -> 자원을 캔다 -> 오두막을 건설한다 -> (반복)...


저는 게임을 하면서 맥이 빠져 버렸습니다. (게임의 결과가 뻔히 보였으니까요.) 그래도 석기시대가 아이들한테는 쉬운 게임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이들이 그날 벌어 그날 다 쓰고 하얗게 불태우는 식으로 일차원적인 플레이만 보여줬네요. 아이들이 왜 그렇게 했을까에 대해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봤을 때에 아이들은 분명 점수를 내는 루트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즉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큰 점수를 주는 루트 (오두막 건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큰 득점 루트 (문명 카드)보다 더 커 보였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게임이 언제 끝날지 (아이들 스스로) 계산할 수가 없어서 건물로 점수를 바로바로 먹는 게 더 확실해 보였겠죠.


또한 게이머가 아닌 어른들에게 가르쳐줄 때에 흔히 놓치는 부분들이 생각났는데요. 첫 번째로, "지속적인 효과"를 과소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석기시대는 전형적인 일꾼 놓기 게임이어서 일꾼이 많을수록 유리하며 일꾼 수에 비례해서 부담을 주기 위해 라운드마다 밥을 먹이는 유지 비용이 있습니다. 그 유지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면 당연히 일꾼을 늘리지 않는 것이 더 나은데, 석기시대에서는 농사를 통해서 아주 쉽게 영구적으로 유지 비용을 낮출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은 몇 라운드를 겪고 나서 이걸 깨달은 것이죠.

두 번째로, 자신의 운을 과대평가한다는 겁니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니까 오늘 게임도 잘될 것이다.'라는 과신을 하고 운이 좋지 못할 때를 전혀 대비하지 않는 경우가 있죠. 석기시대에서는 주사위 운을 조금 상쇄해주기 위해서 돌도끼를 개발할 수 있지만 아이들은 자신의 운을 너무 믿었던 것 같습니다.

세번째로,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해도 상관없는 것을 거꾸로 합니다. 좋은 효과를 가지는 마을 건물을 나중에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자원 채취나 사냥 칸에 먼저 들어갑니다. 심지어 시작 플레이어일 때에도요. 내가 한 번 안 해서 남이 한 번 하면 서로 2번의 차이로 벌어지게 되는데, '내가 안 하면 남도 안 하겠지.' 이렇게 순진하게 생각하는 걸까요? ^^;;


제가 아이들보다 170여점을 더 앞선 채로 끝이 났지만 기분이 좋지 못했던 하루였습니다. 아그리콜라에 대한 기대는 당분간은 접어둬야 할 것 같네요.


보드게이머 육성 프로젝트, 아이 잼 어른 잼 제12화에서 계속됩니다
Posted by Mounted 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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