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인 토요일에 보드게임 모임이 있었는데 참가를 못하고 집에 있었습니다. 이래저래 신경써야 할 일들이 많아서 집에서 조금씩 해결하고 있었죠. 덕분에 일찍 잠들어서 일요일에 도서관으로 일찍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없는 행복이라도 만들어서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어요. ㅎㅎ)

오후 1시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 이게 왠일? 도서관이 이미 열려 있고 심지어 불도 켜져 있는 게 아니겠어요? 그리고 안에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학생 둘이 책장을 스캔하고 있었습니다. 도서관 문밖에는 애증의 (?) 찬호가 안으로 들어가지 못 하고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들어가니까 따라 들어오더라고요.

테이블에 세팅을 하니 여학생들이 따라서 앉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보드게임 하러 온 거에요?"
라고 묻자,
"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게 얼마만에 새 아이들이 온 건지! 이름과 학년을 물어봤는데, 세상에나! 둘 다 이제 5학년 되는 초등학생이라는 겁니다. 저는 중학생으로 봤거든요. 어쩌면 둥글둥글하며 아직은 키가 덜 자란 마성의 (?) 찬호 옆에 있어서 더 그렇게 보였는지도... 저 어렸을 때 기억으로도 이 나이 또래의 여학생들이 남학생들보다 먼저 성숙해져서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던 것 같네요. 아무튼 3살은 어려보이는 찬호에게 꼬박꼬박 '오빠'라는 호칭을 부르는 걸 들을 때마다 역으로 '누나'라고 불러야 되는 거 아닌가라는 착각이 들었단 건 비밀.

아무튼 호구 조사 (그 '호구' 아닙니다!)를 마쳤으니 제 수업의 원칙을 얘기하며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1. 게임을 망가뜨리지 않아야 한다
  2. 정정당당하게 해야 한다
  3.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 해야 한다
  4. 서로 즐겁게 해야 한다



정말 오랜만에 고학년반 수업이 열렸습니다. 연초에 쉬고, 설 연휴 쉬고... 이날 오지는 않았지만 쉬운 게임을 하고 싶다는 정웅이의 요청에 따라 쉬운 게임을 준비했는데, 어쨌거나 덕분에 새로 온 아이들에게 그들의 첫 번째 게임으로 아주 적당한 게임을 가르쳐주게 되어서 참 다행이었습니다. 이날의 게임은 Keltis: Das Kartenspiel 켈티스: 카드 게임이었습니다. 원래 Lost Cities 잃어버린 도시들이라는 제목으로 2인 게임으로 발매되었다가 나중에 Keltis라는 제목으로 바뀌고 4인까지 가능하도록 확장되었는데, 그 게임에서 보드를 쏙 빼고 카드만 남겨놓은 스핀-오프 게임입니다. 그런데 휴대성 때문에 저는 이게 좋더라고요.

여자 아이들에게 맞춰서 차근차근 설명했습니다. 보드 게임 경험이 별로 없는 아이들이어서 좀 걱정을 했는데 규칙 이해는 잘 해서 다행이었습니다.

진행이 빠르고 짧은 게임이라서 총 4번을 했는데요. 찬호 - 은주 - 수경 - 저순으로 돌아가며 시작 플레이어가 됐습니다. 지켜본 소감을 좀 적어보겠습니다.

일단 이 게임에서 턴마다 할 수 있는 행동이 크게 4가지인데, 처음엔 익숙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보통 일반 사람들에게 보드게임이란 할 것이 한 가지로 정해져 있죠. 주사위를 굴려서 트랙을 도는 것처럼요. 서양식 현대적인 보드게임에서 플레이어가 무언가를 선택하게 하는 것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무작정 색깔 카드를 내려놓는 경우가 많았고, 찬호는 좀 예외적으로 소원의 돌 규칙을 잊지 않고 초반부터 기회가 되는 대로 획득하려 했습니다. 수업 태도 면에서 제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뿐, 찬호는 게이머적인 센스가 있는 아이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버려진 더미의 맨 위 카드를 가져가는 걸 자주 잊어버렸습니다. 자신이 달리고 있는 색깔이고 순서도 맞다면 가급적이면 버려진 더미에서 가져가는 게 확률 면에서도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아이들은 놓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자 아이들이 2시 반에 시작하는 인기가요 앞부분 놓치는 걸 걱정하던데, 게임에 집중해야지!! ㅎㅎ (그 와중에 제가 인기가요 오후 5시에 하는 거 아니었냐며... 언제적 얘길 한 건지. ㅋㅋ 제가 주말에 TV을 안 본지 엄청 오래됐거든요.)

그래도 다행스러웠던 건 인기가요 시간이 가까워졌음에도 여자 아이들은
"선생님, 한 번만 더 해요! 이제 잘 할 수 있어요!"
라며 인기가요를 과감히 포기하고 보드게임 수업을 택해줬다는 겁니다.

세 번 모두 제가 이기고 마지막 네 번째 게임에서는 찬호가 소원의 돌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그 때문에 나머지 세 명이 소원의 돌이 말려서 찬호가 1점차 승리를 했습니다. 찬호, 제법이야~! 다른 사람을 말아서 이길 줄도 알고.


신입생이 들어온 교정의 풍경처럼, 두 명의 풋풋한 보드게임 새내기들 덕분에 우리 보드게임반에도 상큼한 봄날이 찾아오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보드게이머 육성 프로젝트, 아이 잼 어른 잼 제19화에서 계속됩니다
Posted by Mounted 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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