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인 토요일 아침이 아니라 약간 새벽에 인터스텔라를 보고 그날 밤 늦게까지 게임을 하느라 심신이 피곤해져 있는 상태로 일요일 아침에 아이들을 가르치러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고학년 반은 오후 1시에 시작하는데, 또 12시로 잘못 기억하고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습니다. 할 게 없어서 도서관에 비치된 책들을 몇 권 읽기로 했죠. 한 20분 즈음 지나니까 한 어머니가 두 아들을 데리고 들어와서 한쪽 테이블에 앉으시더군요. 도서관장님이 적어놓고 간 메모에 따르면 이 아이들 중 한 명이 이번 고학년 반에 들어올 3학년 종혁이일 거고요. 4학년과 5학년 학생으로만 구성된 고학년 반에 3학년 아이가 왔는데, 그 아이 엄마의'게임 잘 할 겁니다'라는 말에서 '보드게임을 어떻게 알고 계실까?'라는 질문이 생기면서 걱정이 좀 됐습니다.

또 한 20여 분 지나니까 5학년 찬호가 왔고, 거의 1시 정각에 4학년 민주가 오면서 이날 올 사람은 모두 모이게 됐습니다. (4학년 정웅이는 할아버지 댁에 가느라 결석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자주 빠져서 좀;;;)

수업에 처음 온 종혁이에게 저의 4가지 원칙을 설명해 줬습니다.
  1. 게임을 망가뜨리지 않아야 한다
  2. 정정당당하게 해야 한다
  3.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 해야 한다
  4. 서로 즐겁게 해야 한다


고학년 반 세 번째 게임은 Splendor 스플렌더입니다. 올해 SDJ 후보에도 오르며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은 게임이며, 한국어가 포함된 다국어판도 국내에 들어와 있죠. 사실 저는 이 게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비슷하다고 평가를 받는 Saint Petersburg 상트 페떼르부르크에 비해 카드 운이 심해서 운영하는 맛이 떨어진다고 느꼈거든요. 그래도 아이들이 하기에는 적당할 것 같아서 이 게임을 빌려서 가져가 봤습니다.

규칙을 설명해 주는데, 종혁이가 살~짝 넋이 나간 것 같습니다. 부분별로 설명을 끊으면서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을 했는데 모르겠다고 합니다. 다행인 건지 나머지 아이들은 "현재로서" 알아들은 것 같이 보입니다. 종혁이부터 시작해서 민주, 찬호 순으로 진행이 됐습니다.

종혁이가 첫 턴에 카드 3장을 집었습니다.
'아이고, 머리야...'
다른 아이들이 소리를 지릅니다.
"그게 아니고! 칩을 3개 가져가는 거라고!"
종혁이가 같은 색 2개와 다른 색 1개를 집자, 다른 아이들이 또 큰 소리로 말합니다.
"다른 색깔 3개를 집으라고!"
2주 전에 카르카손 하면서 멘붕이 왔던 민주가 스플렌더 설명을 잘 알아들은 것 같아서 참 다행이었습니다.

민주는 1레벨짜리 카드를 차근차근 모아갔고, 찬호가 약간 특이하게 진행을 했습니다. 게임 시작 전으로 돌아가면...

스플렌더를 꺼내서 테이블에 올려놓자 아이들이 서로 칩 색깔을 정하는 겁니다.
"나는 다이아몬드!"
"나는 빨간색!"
"나는 초코!"
저는 어이가 없어서,
"일단 설명부터 듣고 하죠?!"
그래도 아이들은 제 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색깔을 열심히 외쳐댔습니다.

찬호는 설명을 다 듣고 난 후에도 자기는 끝까지 다이아몬드가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게임 중에도 다이아몬드 칩을 열심히 모았고, 심지어 칩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10개를 초과하는 칩들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다이아몬드를 열심히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얘가 왜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플레이하는 거지?!'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모은 칩으로 점수가 높은 2레벨이나 3레벨짜리를 바로 구입하더군요.

다시 종혁이가 많이 헤메는 것 같아서 옆에서 가이드를 살짝 했습니다. 귀족을 보석 칩을 주고 사는 건 줄 알아서 귀족은 카드를 모았을 때 가져오는 거라고 한 번 더 설명을 해주었죠. 종혁이가 어려워하는 점은 목표는 잘 정하는데 그 목표로 가는 과정을 잡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귀족 가져오려면 어떤 게 부족해요?"
"빨간색 카드요."
"그럼 빨간색 카드 가져오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가지고 있는 이 카드들이 보석 역할을 하는 건데요."
"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카드들이 보석을 생산한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해서 계속 헤메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제가 도와줘서 종혁이가 귀족 타일들을 쉽게 모아서 손쉽게 첫 게임에서 승리했습니다.



두 번째 게임은 저까지 4명이서 하기로 했습니다. 한 사람, 찬호만 반대했지만요. 저부터 시작이었는데, 찬호가 제가 게임에 못 들어오게 하려고 귀족 타일들을 호주머니에 숨기는 만행 (?)을 저지르더군요. 나중에 다시 돌려줘서 게임이 계속 진행됐습니다.

찬호가 순서상 마지막 플레이어였는데, 첫 게임과 똑같은 방법으로 특정 색깔들의 칩만 모으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갑자기 제 머리 속에 스파크가 번쩍하고 일어났습니다. 첫 번째 게임할 때에 제가 종혁이에게 했던 말이 떠오르면서요.
'게임할 때에 본능적으로 하지 말고 계산을 하면서 해야 돼요.'

저는 찬호가 하는 걸 보고 본능적으로 비효율적이라고 해버렸는데, 저는 그걸 머리 속에서 계산해 본 적이 없던 겁니다. 보석을 생산할 1레벨짜리 카드를 많이 사는 것은 효율적이면서 또한 비효율적이었던 것이죠! 카드는 보석을 1개씩 생산해주기 때문에 많이 가지고 있으면 나중에 보석을 많이 요구하는 카드를 적은 비용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반대로 그러한 낮은 레벨의 카드를 사기 위해서 많은 (칩을 가져오는 것 그리고 카드를 구입하는) 행동들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카드가 주는 공짜 보석의 혜택을 얻으려면 카드를 구입하는 행동을 많이 해야 하는데, 게임에서 카드를 구입하는 행동이 생각보다 많이 일어나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중후반에 효율적인 것을 하기 위해서 초중반에 비효율적인 행동을 많이 하기 때문에 실제 효율성이 낮아지거나 심지어 상쇄되어 없어져 버리기도 하는 거죠. 다른 플레이어들이 칩을 가져왔다 버리며 카드를 구입하는 것을 반복하는 사이에 찬호는 점수가 높은 카드를 하나씩 모으는 거였습니다.


제가 15점을 달성해서 종료 조건을 달성했는데 찬호가 칩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마지막 플레이어였습니다. 13점이었던 찬호가 2점짜리 카드를 구입하면서 동점이 됐는데, 카드 개수가 적은 찬호가 승리를 했습니다.


찬호가 생각없이 한 행동인지, 아니면 본능적으로 한 건지 모르겠으나 이 아이에게 크게 한 방 먹은 느낌이었습니다. 덕분에 스플렌더가 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보드게이머 육성 프로젝트, 아이 잼 어른 잼 제8화에서 계속됩니다
Posted by Mounted 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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