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걱정을 많이 하고 있는 초등학교 저학년 반의 두 번째 수업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아이들의 참여가 저조한 것도 걱정이고, 제 게임이 무사히 살아서 돌아올지 확신이 없어서 또한 걱정이었죠. 금요일 즈음에 도서관장님과 전화 통화를 하려고 했으나 개천절이어서 토요일로 미뤘는데, 토요일에 보드게임 하고 놀다 보니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나버려서 통화도 하지 못하고 일요일을 맞이했습니다. 도서관장님이 1시에 하면 좋겠다고 하셨지만 이전 수업까지는 오후 12시에 시작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12시에 맞춰서 가기로 했습니다.


밤을 새서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게임 하나 챙겨 들고 도서관으로 향했는데 상상도 못한 일이...

도서관 앞에 처음 보는 남자 아이 한 명과 여자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문을 열자 아이들도 따라서 들어왔습니다. 한쪽 테이블에 무릎담요를 깔고 게임을 할 준비를 마쳤는데, 아이들은 책에만 관심을 줍니다. 10분 즈음 지나서 아이들이 더 오지 않는 것 같아서 게임을 시작할 테니 자리에 앉아달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새로온 그 두 명의 아이들에게 세 가지 당부를 했죠.
  1. 게임을 망가뜨리지 않아야 한다
  2.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 해야 한다
  3. 서로 즐겁게 해야 한다

보드게이머가 아닌 일반인 (?)들에게 게임을 가르칠 때에 이 세 가지는 정말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른이더라도 남의 물건을 함부로 사용하거나 무의식적으로 손에 힘을 과하게 주어서 카드를 말거나 접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의식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주의를 주었습니다. 또, 게임에서 이길 가망이 없다고 이상하게 진행하거나 게임 중간에 나가버리는 일도 있는데, 이러한 행동은 같이 게임하는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무례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규칙에 맞는 진행을 통해 좋은 결과를 내면 그 노력에 대해서 인정을 하고 축하를 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 번에 내가 승리를 할 때에 나의 승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가 있겠죠. 마지막은 게임의 가장 큰 목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게임은 사람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합니다. 외국인들과 온라인 게임을 할 때에 게임 시작 시에 채팅 창에 서로 입력해 주는 hf (have fun, 즐거운 시간 보내)가 정말 중요한 말이라는 거죠. (특히나 상호작용이 직접적인 게임에서) 내가 즐겁게 하기 위해서 특정 한 사람을 여러 명이서 괴롭히는 행동은 제 수업에서 절대 허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새로온 여자 아이, 채민 양이
"게임에서 이겨서 뭐 해요?"
라고 질문을 했을 때에 제가
"기분이 좋잖아요?!"
라고 답한 것은 진심에서 나온 말이었던 겁니다. 꼭 무언가를 바라고 게임을 하다 보면 내기와 도박에 빠지기 쉬우니까요.



저학년 반의 두 번째 게임은 Carcassonne 카르카손입니다. 제가 초보자 시절에 배웠지만 큰 재미를 못 느끼다가 수 년 지나서 컴퓨터 애플리케이션으로 해보고 재미를 깨달은 훌륭한 게임이죠. 일반인들이 보면 퍼즐 정도로 유치하게 보일 수 있는 타일 놓기 게임이지만 게임의 규칙을 파고 들면 그 규칙 속에 훨씬 더 치열하면서도 재미있게 진행할 수 있는 방법이 보입니다. 아이들에게 그정도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퍼즐 맞추듯이 쉽게 접근하라고 이 게임으로 선택했습니다.

아이들이 호기심을 발동하도록 배경 설명부터 했습니다. 프랑스 지역 이름이고, 이곳에 오래된 성들이 많고... 블라블라... 빨리 시작하길 바라는 아이들에게 인내심을 요구하며 규칙을 하나 하나 이어가는 것이 힘든 일이지만 다행히 아이들이 끝까지 잘 들어주었습니다. 드디어 타일을 뽑으면서 게임을 시작했죠. 그런데...

2주 전에 왔던 아이들 중 2명이 문을 열고 헐레벌떡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무척 반가웠습니다. (기다리는 사람 마음이 그렇죠.) 여자 아이는 예슬 양, 남자 아이는 재혁 군입니다. 오늘 처음 본 채민 양은 보기보다 남성적인 기질이 세서 검은색을 골랐습니다. (스스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예슬 양은 노란색, 재혁 군은 빨간색을 선택했네요. 처음 온 남자 아이는 파란색을 잡았습니다. (일단 이 아이의 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아이들은 사람 모양의 말을 놓아서 일정 지역을 점령하는 것을 잘 파악했습니다. 아이들이 착해서 그런지 서로 도와주면서 뽑힌 타일이 잘 들어맞을 만한 장소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카르카손은 참 평화로운 게임...으로 알려져 있죠.) 게임의 후반에 지난 수업에 왔던 기현 군이 왔는데, 하고 있던 게임을 끊을 수 없어서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게임은 50분 정도 소요하면서 제 예상과 달리 빠르게 진행됐습니다.

두 번째 게임은 제가 빠지고 늦게 온 기현 군 (남은 초록색 선택)까지 5명이서 진행했습니다. 제가 설명을 해주려고 했는데 기현 군이 옆에서 구경하면서 규칙을 대략 이해했다고 해서 게임을 하면서 재혁 군이 추가 설명을 해주기로 했습니다. 걱정했던 대로 재혁 군이 '자신이 방금 뽑아서 놓은 타일에만 사람 말을 놓을 수 있다'는 규칙을 몰라서 다른 아이들에게 이리 놔라 저리 놔라 얘기했다가 나머지 아이들에게서 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 두 번째 게임을 끝내고 마치려고 했는데, 아이들이 40분만에 게임을 끝내 버려서 한 게임을 더 하기로 했습니다. (늦게 온 기현 군이 한 번밖에 못 해서 한 번 더 하는 게 좋아 보였습니다.)



두 번째 게임부터 아이들이 사람 말을 낭비하면 안 된다는 것을 터득한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이 타일을 놓은 후에 제가
"사람 말 안 놓을 거에요?"
라고 물으면
"안 놓을 거에요! 아껴야 돼요!"
라고 대답을 하더라고요. 그런데 세 번째 게임에서는 나머지 아이들보다 한 학년 아래인 남자 아이의 점수가 좀처럼 오르지 않았습니다. 제 기억을 더듬어보니까 중반부터 계속
"내가 꼴등이에요!"
라면서 조금 신경질적으로 외쳤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타일이 몇 개 남지 않아서 두어 라운드가 남은 그 때에 (아이들이 똑같은 턴을 진행하도록 맞춰주었습니다) 그 남자 아이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발을 올려놓았습니다. 자기 차례가 되었는데도 팔짱을 풀지 않고 있었습니다.
"기분이 안 좋아요?"
대답이 없습니다.
"안 할 거에요?"
역시 대답이 없습니다. 표정을 보아 하니 힘들다 싶어서 다음 아이에게 차례를 시작하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게임이 끝나고 점수 계산을 하려고 하는데, 그 남자 아이가 테이블에 놓인 타일들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손가락으로 퉁겨서 테이블 밖으로 쳐내기도 했고요. 제가 수업 시작 전에 강조한 것을 어기고 있어서 말로 타이르며 주의를 줬습니다. 그러자 양 검지 손가락으로 양 귀를 막고 듣지 않는 척을 합니다. 계속 주의를 주자 그 아이는 무릎담요를 당겨서 테이블 위에 던져 놓고 문을 세게 닫으며 집으로 가 버렸습니다. 나머지 아이들도 놀랐는지 분위기가 가라앉았습니다.


내일 도서관장님하고 얘기를 나눠보는 게 좋을 것 같았습니다.


보드게이머 육성 프로젝트, 아이 잼 어른 잼 제4화에서 계속됩니다
Posted by Mounted 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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