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초등학생 고학년과 저학년 각 반을 동시에 진행하려고 했으나, 고학년들이 아무도 오지 않아서 이번 주에 고학년을 모아서 수업을 진행하겠다고 도서관장 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전에 수업을 해주신 분이 3-4학년 아이들 4명을 모아서 진행을 하셨는데, 제가 수업을 맡으면서 그 아이들 중 한 명만 남고 나머지 아이들은 각자의 이유로 수업을 그만두었습니다. 새로운 아이들 3명이 합류하면서 거의 완전 새로운 반이 만들어진 것이죠.


어떤 아이들이 올지 기대를 하며 도서관에 갔는데...

마을 도서관 앞에 한 남자 아이가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제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아이도 따라들어옵니다. 저의 예상대로 보드게임 수업 때문에 왔다고 합니다. 한 테이블에 무릎담요를 깔며 수업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아이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찬호라고 합니다. (한 야구 선수가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뻔하게 묻는 질문 몇 가지를 했습니다. 보드게임을 해봤는지, 무엇을 해봤는지 등을요. 아니나 다를까 "부루마블"을 얘기하더군요. ^^

잠시 후에 한 여자 아이가 들어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름과 해본 게임 등을 물어보며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이 아이는 민주라고 하네요. 집에 부루마블은 있는데 어려워 보여서 해본 적은 없다고 합니다. 제가 여자 아이들의 세계를 잘 몰라서 일반적으로 여자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 게임을 접할 기회가 많은지 적은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남자들의 경우는 정말 어렸을 때부터 공놀이나 다른 게임을 시작으로 서로 경쟁하고 시합하는 환경에 매우 친숙하죠.

보드게임을 깊게 하는 사람들은 남자가 대부분입니다만 보드게임 카페에 가는 이유 중에 대부분은 여자들 때문이라고 봅니다. 남자들은 보드게임이 아니더라도 서로 겨루며 시간을 보낼 거리들이 많습니다. 다양한 운동을 해도 되고, PC방에 가서 컴퓨터 게임을 할 수도 있죠. 그러나 여자들이 포함이 되어 있으면 그런 곳에 가서 시간을 보내기가 좀 어색해집니다. 그래서 노래방이나 카페 같은 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데, 보드게임 카페도 한 대안으로 선택이 됩니다. 그런데 보드게임 카페에서 어떤 게임을 할지는 일반적으로 여자들에 의해서 선택이 되고, 남자들은 그에 맞춰서 따라가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보드게임 카페는 여자들 때문에 가게 되는데, 여자들이 게임 (더 정확하게 말하면 게임 속의 환경)에 익숙하지 않아서 보드게임 카페에서 선택할 수 있는 많은 선택지들 중에서 대부분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큰 딜레마죠.

저는 가급적이면 고학년과 저학년 반 모두에 여학생이 포함되어 있기를 바랬습니다. (다행이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저는 경험을 굉장히 중요시 하는데, 경험이라는 것은 대물림 (?)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가정이나 학교에서 일생에 필요한 대부분의 지식과 경험을 얻습니다. 학교는 학생들의 공통분모라서 서로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게 되는데, 그 외의 모든 부분은 가정에서 차이가 나게 되죠. 부모가 어떤 영역을 알고 있다면 또는 경험하고 있다면 자녀는 부모의 지식과 경험을 자연스레 물려받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부모 중 어느 하나라도 보드게임을 알고 있고, 취미로 하고 있다면 자녀는 보드게임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레 체득하는 것이죠. 유럽이나 미국 쪽은 이미 그렇게 보드게임을 전파해오고 있기 때문에 게임 박람회에서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이렇게 삼대가 같이 테이블에 앉아서 게임을 즐기는 것이 가능한데, 우리나라는 이제 이대까지 내려오는 중입니다. (한국의 보드게임 인구가 적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경우가 훨씬 더 많죠.) 부모가 보드게임을 잘 모르는 가정이라면 그들의 자녀는 보드게임을 스스로 찾아서 배워야 합니다. 어쩌면 그럴 기회가 인생에서 아주 늦게, 심하면 아예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나 게임을 접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더 적은 여성들이라면 이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할 테죠. 제 수업을 통해서 여자 아이들이 보드게임을 접하고 자신의 취미들 중 하나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수업 시작 시각에서 10분이 지나자 저는 나머지 아이들이 오지 않는 것으로 판단하고 저까지 셋이서 게임을 하기로 했습니다.



고학년 아이들과 할 첫 번째 게임은 Palazzo 팔라초입니다. (☞ 리뷰 링크) 크고 아... 아름다운 (?) 건물을 짓는 경매 게임인데요. 돈을 주고 타일을 구입하고 개조를 통해서 건물을 변형하는 게 아이들에게 재미를 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해서 이 게임으로 골랐습니다. 진행 시간도 60분 정도로 길지 않으면서, 플레이어들이 번갈아서 돈을 가져오거나 경매를 할 때 다른 플레이어도 참가하기 때문에 다른 플레이어의 턴 동안 지루하게 기다리지 않아서 아이들에게 적당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은 설명 시작 전에 테이블에 놓는 채석장 타일이 퍼즐처럼 서로 맞춰지는 줄 알고 이리저리 옮기고 돌려가면서 맞춰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경매할 채석장을 표시하는 건축가 마커가 플레이어 마커인 줄 알고 마커가 그거 하나뿐이냐며 궁금해 하기도 했고요.

찬호 군이 상자 안에 한글 규칙서가 있는 것을 보고 읽어보겠다고 했습니다. 건네줬더니 규칙서가 8쪽이나 된다면서 어렵겠다고 겁을 먹었습니다. (준비와 예시, 그림 빼면 그렇게 긴 편은 아닌데...) 설명이 20분이 넘어갔는데, 중간중간에 규칙을 정리해주면서 강조를 했습니다. 일단 아이들 표정은 (매우 다행스럽게도) 거의 다 알아들은 것 같았습니다.

할 수 있는 세 가지 행동 중에서 건물 개조는 처음에 불가능하다는 걸 안 아이들은 '통화 카드 가져오기' 행동으로 게임을 시작했습니다. 저도 그 행동을 선택했고요. 가운데에 놓인 채석장에 건물이 어느 정도 쌓이자 아이들이 스스로 계산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낮은 층수의 타일을 먼저 확보해야 하고, 고득점을 위해서는 가급적이면 한 건물 안에서 타일 색깔을 통일시키는 게 좋다는 것을 아이들도 잘 알고 있는 듯 했습니다. 타일 색깔을 잘 맞춰서 가져간 민주 양이 3채의 건물을 보유했는데 창문의 수도 꽤 많아서 첫 번째 게임에서 쉽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승패에 상관없이, 요령을 깨달은 아이들은 이때 이렇게 말을 하죠.
"선생님, 한 번만 더 해요!"



그리고 두 번째 게임이 시작됐습니다. 아이들은 좋은 타일을 가져오기 위해서, 그리고 타이밍을 잘 조절하기 위해서는 통화 카드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나 봅니다. 아이들은 손에 어느 정도 채워질 때가지 계속 '통화 카드 가져오기' 행동을 했습니다. 돈이 어느 정도 갖춰지지 않으면 괜히 경매 선언했다가 상대에게 건물 타일을 내주게 된다는 걸 이전 게임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죠.

지난 주에 저학년 아이들이 카드를 구긴 것 때문에 카드를 손에 오래 못 쥐게 하기 위해서 목재 카드 홀더를 몇 개 가져갔었습니다. 수업 시작할 때에 강조한 '카드를 망가뜨리지 말라'는 것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 아이들에게 그 카드 홀더로 시범을 보였는데, 아이들 반응은 시큰둥했습니다. 그냥 손에 들고 하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죠. 그러나 첫 번째 게임을 하면서 아이들이 손에 카드를 많이 쥐고 있기가 힘들다는 것을 느꼈는지, 두 번째 게임을 할 때에는 카드 홀더를 달라고 하더군요. (카드 독립 만세!!)

민주 양 차례에서 세 번째 타일 더미에서 다섯 번째 '왕의 행차 타일'이 나오자마자 게임이 바로 끝나야 하는데, 그 타일이 나오자 마자 찬호 군이 게임을 더 해야 한다며 그 타일을 타일 더미와 섞어버리는 바람에 강제로 더 진행을 하게 됐습니다. 민주 양도 그러자고 해서 다수결에 의해 (?) 게임이 한 바퀴 더 돌게 되었습니다. ('민주적'입니다. 언어의 유희왕!) 덕분에 찬호 군과 저는 감점이 확실했던 단층 건물을 개조시켜서 감점을 없앴고, 아주 우연히 아무도 예상치 못하게 (?) 제 턴에 마지막 왕의 행차 타일이 나오면서 게임을 끝냈습니다. 점수를 계산해 보니 감점을 없애고 보너스를 추가한 찬호 군과 제가 공동 1등을 했습니다. 민주 양이 전 상황에서 끝냈으면 이겼을 것 같은데, 찬호 군의 말을 듣고 1등을 놓쳐 버렸죠.


아이들은 더 하고 싶어했지만 아이들을 쉬지도 않고 2시간 넘도록 앉아 있게 하는 게 좋지 않은 것 같아서 수업을 마쳤습니다. 딱 두 게임 정도가 좋은 것 같더군요. ^^ 아무튼 아이들이 제가 선택한 첫 번째 (전략) 게임을 무난하게 소화를 했고 재미를 느낀 것 같아서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그런데 카드들은 무사했지만, 흥분 상태였던 아이들이 타일들을 손톱으로 '닥닥닥닥' 찍어서 상처가 좀 났습니다. 뼈를 지키려고 살을 내준 것 같은... (왜 저는 혼자 디펜스 게임을 하고 있는 거죠?) 이정도라면 앞으로도 카드가 들어간 게임을 계속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저조한 참석률을 높일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아이들이나 엄마들이 보드게임 수업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 약속해 놓고 나오지 않는 것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 물어봐야죠. 그런데 다음 주는 다시 저학년 수업이라 벌써부터... 윈터 이즈 커밍...?


보드게이머 육성 프로젝트, 아이 잼 어른 잼 제3화에서 계속됩니다
Posted by Mounted 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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