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에 보드게임 모임의 한 분에게서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되었습니다. 일요일마다 마을 도서관에서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보드게임을 가르치고 계셨던 그분은 그 수업을 제가 이어받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저는 앞뒤 크게 재보지 않고 수락을 했습니다.

약속한 날짜가 가까워오자 몇 가지 불안감이 엄습했습니다. 첫 번째, '내 게임들이 무사할 수 있는가?' 어른들도 무의식적으로 게임을 훼손하는데, 아이들은 오히려 더 심할 것 같았습니다. 두 번째, '아이들이 내가 설명하는 것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어린 아이이거나 초보자들에게 단골로 추천하는 가벼운 게임이 아니라 생각을 요구하는 전략 게임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얼마나 따라올 수 있을지 예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도서관 관계자들이나 아이 부모님들이 보드게임을 얼마나 이해하고 공감하게 될까? 어른들이 생각하는 '애들이나 하는 놀이'로 치부하고, 일요일마다 귀찮은 아이들을 나에게 맡겨놓고 그들은 다른 일을 보려는 게 아닌가라는 의심도 좀 들었습니다. 저에게 떠넘겨진, 극복해 나아가야 할 임무 정도로 느껴졌습니다.


지난 주에 도서관에 사전답사를 갔습니다. 도서관 관계자와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려고요. 일단, 제가 느낀 것은 도서관장님은 보드게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를 소개하신 분이 전적으로 다 맡아서 수업을 끌고 나가고 그 이외의 사람들은 약간 배척되어서 (혹은 관심이 없어서) 일년 간 진행됐던 수업을 잘 모르고 계셨던 것 같았습니다. 우연히 그날 일년간 아들을 보냈던 어머님 두 분과 함께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기쁘게도 아들들 못지 않게 어머님들이 보드게임 (수업)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계시고, 아이들의 달라진 태도에 대해서 흡족해 하고 계셨습니다. 다른 어머님들께 소문을 내서 저학년 자녀가 있는 어머님들도 은근히 자신들의 차례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 금요일, 확인차 도서관장님과 전화통화를 했는데,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저학년 반이 추가로 만들어졌고, 신청자가 6명이나 된다는 것을요. 안타까운 건, 지난 일년 동안 함께했던 아이들 중 절반 (2명)이 제가 할 수업에서 빠지고 다른 아이들이 들어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도서관장님이 공지를 잘못해서 두 반이 같은 시간에 동시에 시작하는 것으로 전달됐다는 겁니다. 제가 구상했던 수업이 많이 틀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일요일, 동시에 두 반을 가르쳐야 하는 기대를 하고 도서관에 도착했는데...

8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 한 명이 도서관 밖에서 활기찬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열쇠로 도서관 문을 열자 저를 따라 들어옵니다.
"오늘 보드게임 하러 왔어요?"
라고 묻자 그렇다고 합니다.

도서관 내에 있는 두 탁자에 검은 담요를 깔고 있는 사이에, 그 (여자) 아이는 그 안에서 이것저것 구경하느라 분주합니다. 그리고 곧 다른 (남자) 아이 한 명이 왔습니다. 그리고 어른 여자 한 분이 와서 저와 인사를 나누고 그 어색한 상황을 정리해 주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몇 시간 뒤에 오실 도서관장님의 부탁으로 따님이 저를 도와주러 오신 거였습니다. 예상과 다르게 아이들이 오지 않자, 도서관장님 따님이 아이들 어머님들께 전화를 걸어서 참석 여부를 여쭙고 있었습니다. 제사에 간 아이, 캠프에 간 아이, 집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 등... 제가 많이 실망하게 된 상황이라 제 표정이 어두워져 갔습니다.

나중에 남자 아이 한 명이 더 와서 세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문제는 제가 가져간 게임은 인원수가 짝이 맞아야 할 수 있는 것이어서 한 사람이 부족했습니다. 저는 도서관장님 따님께 진지하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혹시, 다른 약속 있으세요?"
"아뇨, 그렇진 않은데요..."
"그러면, 아이들하고 게임을 같이 해주실 수 있으세요?"
그러자 약간 어두워진 표정으로
"제가 그렇게 관심있어 하는 게 아니라서요..."
잠시 침묵이 흐르고,
"게임 한 판 하는 데에 얼마나 걸리죠?"
"아마 한 시간 정도 걸릴 거예요."
"그렇게 오래 걸려요?"
"온 아이들이 헛걸음 하지 않게 그래도 조금만이라도 같이 해주실 수 있을까요? 하다가 중간에 가셔도 되고요."
"그러면 10분만 시간을 주세요."

10분 정도 후에 도서관장님 따님은 아이들과 같이 게임을 하다가 가신다는 조건 하에 게임에 참여를 하셨습니다. 제가 아이들한테도 그분이 게임 하시다가 가셔야 되면 제가 참여하고 게임을 다시 시작하는 것으로 미리 얘기를 했습니다. (제가 도착해서 게임을 시작하기까지 40분이 지났습니다.)



제가 준비한 게임은 바로 Dog 도그입니다. (☞ 리뷰 링크) 게임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이 쉽게 느끼도록 직관적인 경주 게임을 선택했습니다. 윷놀이와 비슷하지만 주사위나 윷패 대신에 카드를 사용해서 말을 이동시킵니다. 특이한 점은, 개인전이 아니라 마주보는 사람들끼리 한 팀을 이루어서 자신의 팀의 모든 말을 도착 지점으로 보내야 승리하는 철저한 팀 플레이 게임입니다. 도그의 또 다른 큰 특징은 다른 말이 있는 칸에 멈추면 잡힌 말을 출발 지점으로 돌려보내는데, 자기편이든 상대편이든 상관하지 않고 잡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신의 차례 때에 무조건 카드 1장을 사용해야 하는데, 자신이나 자신의 팀에게 불리해도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는 강제 규칙이 있어서 핸드 관리를 해야 하는 게임이죠.

게임 규칙을 설명할 때에 윷놀이와 비슷하다는 점을 강조했고, 또한 팀 플레이라는 점도 강조했습니다. 손에 가진 카드를 다 사용할 때까지가 한 라운드인데, 라운드마다 받는 카드의 수가 달라서 미리 준비해간 주사위로 받아야 하는 카드의 숫자를 표시했습니다. (받아야 하는 카드의 수가 6-5-4-3-2-6-5...를 반복하기 때문에 주사위를 사용하면 진행에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라운드 시작 시에 카드를 받은 후에 받은 카드들 중 1장을 자신의 파트너와 비공개로 교환을 해야 하는데, 아이들로만 구성한 팀에서 카드 교환이 잘 안 되어서 한 아이가 출발 지점에 있는 말을 시작 칸에 놓지 못해서 바로 라운드에서 탈락했습니다. (사용할 수 있는 카드가 없으면 핸드를 공개하고 라운드에서 탈락합니다.) 게임 내내 도서관장님 따님과 두 명의 남자 아이들이 서로 열심히 잡고 잡히는 사이에, 여자 아이가 먼저 자신의 말 한 개를 도착 지점으로 보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빨간색 특별 카드들 중에서, 앞이나 뒤로 4칸을 보낼 수 있는 카드가 있는데, 시작 칸에서 뒤로 가면 윷놀이에서 백도와 같은 효과가 있어서 한 바퀴를 돌아온 것으로 간주되는데, 그 카드를 잘 썼던 겁니다. 이에 반해 여자 아이와 한 팀을 이룬 남자 아이가 견제를 많이 받고 실수를 몇 번 해서 도서관장님 따님 팀이 역전해서 승리했습니다.

게임이 끝나서 게임 정리를 하려고 했는데, 도서관장님 따님이 아이들에게,
"우리 한 판 더 할래?"
라고 하셔서 리벤지 매치가 성사됐습니다. (분명히 게임에 관심없어서 중간에 가실 거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


이번에도 여자 아이가 가장 먼저 말을 도착 지점으로 보냈습니다. 놀랍게도 첫 라운드에서 4번째 턴만에 이뤘습니다. 게다가 그 다음 턴에 출발 카드를 사용해서 두 번째 말을 시작 칸에 놓기까지 했죠. 이번에도 나머지 세 명이 서로 잡고 잡히면서 치열한 싸움을 이어갔는데, 게임이 끝날 때 즈음에 양팀 모두 단 한 개씩의 말을 남기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말을 모두 도착 지점에 보내면 그 다음 턴부터는 자신의 파트너의 말을 이동시키기 때문에 그렇게 한 팀은 이동이 훨씬 더 빨라져서 유리해집니다. 양 팀 모두 도착 지점 코 앞에서 라운드가 끝났고 다음 라운드에 카드 교환 후 첫 번째 플레이어가 바로 자기 팀 말을 도착 지점으로 보내면서 한 턴 차이로 게임이 끝나 버렸습니다.

첫 번째 게임은 게임 설명까지 포함해서 한 시간 걸렸고 (제가 말했던 대로 됐네요.), 두 번째 게임에서는 게임 설명 없이 50분이 걸렸습니다. 저는 또 게임 정리를 하려고 했는데, 도서관장님 따님이
"한 판만 더 하면 안 돼요?"
라고 말씀하셨지만
"제가 3시에 약속이 있어서..."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빨리 가고 싶어서 둘러댄 게 아니라 진짜로 약속이 있었습니다.)


게임을 정리하면서 도서관장님 따님이 도그의 가격을 물어보셔서
"좀 비싼데요..."
"얼만데요?"
"6, 7만 원 정도 할 것 같아요..." (확인해 보니 약 €27여서 5만 원 내외일 것 같습니다.)
"얼마 안 하네."

의외로 쿨한 답을 하셔서 저는 속으로 좀 당황했습니다. 게임을 같이 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게임 가격을 알려드렸다면 비싸다고 하셨을 것 같습니다. 게임을 해보시니까 비로소 재미 대비 비용이 싸게 느껴지는 것이겠죠. (여러분! 보드게임은 이렇게 쌉니다! ㅋㅋ) 한 발 더 나아가셔서 아이들한테
"이거 사놓고 도서관에서 할까?"
라고 물어보시더라고요.

버스 정류장으로 가면서 도서관장님 따님과 짧막하게 얘기를 더 나눴습니다.
"보드게임 재미있네요! 저는 카페 같은데 있는 게임인 줄 알았어요."

요즈음에는 카페에 설명이 필요없는 간단한 게임들을 놔두고 손님들이 (알아서)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한 곳이 많습니다. 보통은 시간은 많고 할일은 없는 커플들이 과일 카드를 내면서 종을 땡땡 울리거나, 힘들게 쌓은 나무 토막들을 와르르 무너뜨리면서 깔깔깔 웃어대는 게임들로 인해서 보드게임이 우리 생활에 깊숙히 침투해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오히려 그런 게임들 때문에 나머지 99%를 차지하고 있는 다른 게임들이 묻히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머지 게임들은 규칙을 설명해야 하고 복잡해 보이거나 실제로 복잡하다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보드게임을 전문적으로 하고 있는 게이머들이 아닌 나머지 일반인 (?)들의 보드게임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서 저 스스로도 많은 노력을 해왔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머리가 굳어진 어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세계가 실제와 다르게 왜곡이 되어 있더러도 (굳이 자신들의 노력을 들여서) 그것을 바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그래서 어른들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아이들에게 눈을 돌려서 앞으로 5년, 10년을 내다보고 게이머들을 키우려고 이 봉사활동을 시작한 것이죠. (봉사활동이란 가면 뒤에 이렇게 무서운 저의 계획이 있답니다. ㅎㅎ) 운이 좋으면 아이들 부모님들의 생각이 바뀌게 되어서 자발적으로 아파트 단지 내에 보드게임 모임이 생기고 운영이 되면 그것은 덤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봉사활동 안에 문제점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아이들은 무언가에 집중하면 나머지 영역은 말 그대로 '무의식'이 됩니다. 아이들의 집중력과 계산력이 엄청나서 어른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할 때가 있는데, 그에 반해 집중을 하는 동안에 손이나 발, 몸 등은 자기도 모르게 움직이고 반응합니다. 그래서 카드를 손으로 구기거나 접는 행위가 자신들도 모르게 발생을 하죠. 이건 옆에서 아무리 얘기하고 경고를 줘도 소용이 없습니다. 진짜로 무의식에서 나오는 행동이니까요. 10장에 가까운 카드들이 손상되어서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보드게임 커뮤니티에서 봤던 댓글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보나마나 게임 구성물들이 손상될 거라는... ㅠㅠ) 도그가 구하기 절판된 게임은 아니라서 퍼블리셔에 얘기해서 대체품을 구입하거나 얻을 수 있긴 한데, 앞으로도 수업이 계속 된다면 제 게임들이 수업할 때마다 손상이 될 거란 얘기죠. 저는 제 물건을 굉장히 소중히 다룹니다. 게다가 가지고 있는 게임들 중에 다수는 구하기 어렵거나 비쌉니다. 저학년 반 수업을 계속해야 할지 그만둬야 할지, 계속한다면 어떻게 바꿔야 할지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좋은 취지의 활동을 통해 게이머들의 모임에서 느끼는 것과 다른 보람을 느끼는데, 수집을 하는 게이머로서 고민이 이에 비례합니다.


보드게이머 육성 프로젝트, 아이 잼 어른 잼 제2화에서 계속됩니다
Posted by 관리자 Mounted 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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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너굴너굴 2014.09.23 1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아... 그 딜레마 괴롭죠...
    저는 소모성이라 여기다보니 망가진 것도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지만... 안그러신 분들에겐 볼때마다 괴로움이... :(

  2. 물의아이 2014.09.23 1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일 하시네요.
    저도 아내가 교사라 학교 특활 시간에 하라고 타뷸라의 늑대를 보냈더니
    다 구겨져서 왔더라고요.
    블러핑 게임인대 카드를 구기다니 ㅡㅡ;;
    이런 활동하려면 따로 한 세트를 구매해야겠더군요.
    --
    리뷰가 재밌어서 즐겁게 읽었습니다.
    글 솜씨가 좋네요.
    다음 후기도 기대하겠습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 Favicon of https://mountedcloud.tistory.com BlogIcon 관리자 Mounted Cloud 2014.09.23 15: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이들은 그냥 무의식 상태로 게임 구성물을 만져서 옆에 붙어서 계속 얘기해도 소용없더라고요. 아이들이 주의력을 가지는 데에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ㅠㅠ

      아무튼 제 후기가 재미있다고 하시니 기쁘네요. ^^

  3. 백호 2014.09.23 20: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독했습니다

    저 여자분같이 태도가 바뀌는 분들을 저도 주변에서 종종 봤네요 ㅎㅎ

    역시 비보드게이머(?)에겐 보드게임에 대한 선입견이 팽배해있죠..

  4. 전랑장군 2014.09.29 11: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는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도서관장 따님이 처음 등장했을때, 모두가 예상하는 좋은 방향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라고 속으로 빌었습니다. 다행입니다.
    이 도그 게임 표지만 본적 많이 있네요.
    초보에게 내밀기 쉬운게임 처럼보여서 한번 해보고싶습니다.

    • Favicon of https://mountedcloud.tistory.com BlogIcon 관리자 Mounted Cloud 2014.09.29 17: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보드게이머들 속에 있을 때에는 보드게임에 대한 인식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잘 와닿지 않았는데 이 봉사활동을 하면서 정말 큰 문제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작은 에피소드였지만 굳이 글로 남긴 것도 보드게임 커뮤니티 활동 하시는 분들이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고자 하는 바람에서였어요. ^^ 이렇게 한두 명씩 바꿔가다 보면 언젠가 우리 사회에서 보드게임을 다시 주목해줄 날이 오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