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소비되지 않아야 한다

창원에서 부산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너무 피곤했는지 버스에서 눈이 퉁퉁 붓고 몸이 힘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기절한 것처럼 잠깐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벌써 부산이더군요.

다락 1호점에 가서 스머프2 님과 아스틸 님을 다시 뵙고 좀 쉬다가 다락 2호점으로 갔습니다. 스머프2 님이 새벽에 뭔가를 먹자고 말씀하셨는데 새벽에 그냥 잤습니다.


6월 7일 토요일. 오후 3시부터 다락 1호점에서 스머프2 님이 운영하시는 보드게임 모임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저는 다락 2호점에서 밀린 글을 쓰다가 다락 1호점으로 갔습니다. 스머프2 님께 전해 듣기로는 두 분 정도 더 오시기로 했는데 아직 오지 않으셨습니다. 스머프 2님, 갈비 군과 이런저런 얘기하다 보니 월풍 님과 다른 한 분 (이 분 닉네임 알고 계신 분 있으면 알려주세요.)이 더 오셔서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첫 게임은 Lewis & Clark 루이스와 클락. 미국 역사 테마의 덱-빌딩 경주 게임이죠. 초반에 월풍 님이 치고 나가시고, 갈비 군은 원주민 친구들을 "많이" 사귀느라 배가 느려져서 세인트 루이스에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음식으로 달리는 카드 콤보를 만드느라 시간이 좀 걸렸는데 중반 즈음에 덱이 완성되어서 한 번에 15칸 가까이 치고 나갔습니다. 어쨌거나 월풍 님이 가장 먼저 로키 산맥을 넘고, 갈비 군을 제외한 두 사람도 차례차례 산을 넘었습니다. 마지막에 월풍 님이 계산 실수와 규칙 오해로 인해서 제가 간발의 차이로 포트 클랫섭에 가장 먼저 도착해서 승리를 했습니다. 세 분이 그날 루이스와 클락을 처음 하신 건데 이해도 빠르시고 응용도 잘 하셔서 놀랐습니다.

저녁 시간이 되어서 아스틸 님이 아시는 고추장불고기 집에 갔습니다. 다락 1호점에서 몇 분 걸어가면 잘 안 보이는 곳에 그 고기집이 있는데요. 가격도 싸고 맛있어서 만족스러웠습니다. 아쉽게도 사진을 못 찍었네요. ㅎ


제가 다락에서 노는 동안에 본, 좀 익숙치 않은 모습들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다락에 처음 도착한 수요일 밤에 한쪽에 고등학생들로 보이는 여섯 명이 The Scepter of Zavandor 자반도르의 홀을 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네 명이 Tichu 티츄를 하고 있었습니다. 두 가지 모두 짧지 않은 설명과 깊은 전략성이 필요해서 보드게임 카페에서 일반 손님들이 하지 않는 게임이죠. (규칙은 다른 사람들이 설명했지만) 스머프2 님이 이런 학생들을 저한테 보여주시면서 5년, 10년 후 미래에 거는 기대가 크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목요일 저녁에 부산 마작 동호회 여성 회원 2명이 남자 고등학생 여러 명과 The Resistance: Avalon 레지스탕스: 아발론을 할 때였습니다. 게임이 거의 끝나고 나서 한 남학생이 무의식적으로 카드를 구기려고 하자, 스머프2 님이 바로 혼내셨습니다.

세 번째는 같은 날 오후의 일이었습니다. 한쪽에서 남자 고등학생들이 Puerto Rico 푸에르토 리코를 하고 있었는데, 게임이 끝나자 스머프2 님이 게임 정리까지 시키셨습니다. 한 남학생이 "어떻게 정리해야 돼요?"라고 묻자, 스머프2 님은 "다음에 그 게임을 다시 한다고 생각하고 정리하세요."라고 대답하셨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저와 월풍 님은 "크~~ 정답이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일요일 오후에 성인 남자 3명이 왔을 때의 일입니다. 그들은 이용요금을 묻더니 시간당 1,000원이라는 말에 한 시간씩만 하고 갈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스머프 2님은 그렇게는 손님을 받지 않는다며 덧붙이는 말씀이 "소비되고 싶지 않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위에서 예로 들어드린 마지막 세 가지는 철저히 손님의 입장에서 봤을 때에 불쾌할 수도 있는 것들입니다. 스머프2 님은 부산에 있는 다른 보드게임 카페들과 경쟁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본인의 소신을 굽히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문화는 소비되지 않아야 한다"입니다.

여러분, "문화"란 무엇일까요? 사전적으로는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 또는 생활 이상을 실현하고자 사회 구성원에 의하여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 양식이나 생활 양식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하여 낸 물질적ㆍ정신적 소득을 통틀어 이르는 말. 의식주를 비롯하여 언어, 풍습, 종교, 학문, 예술, 제도 따위를 모두 포함한다.
라고 합니다. 요약하면 "사람들을 가르쳐서 얻어낼 수 있는 집단적 양식"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자기들 편한 대로 놔두면 그것은 문화가 아닌 것입니다.

저는 문화라는 것을 언제 느끼냐면, 영화관에 갈 때입니다. 분명 영화 상영 직전 화면에는 극장 에티켓이라며 앞좌석을 발로 차지 말 것, 휴대전화 소리 꺼둘 것, 휴지는 휴지통에 버릴 것 이 세 가지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정작 영화가 끝난 후에 많은 사람들은 팔걸이에 마시고 난 음료 통이나 좌석에 팝콘 통을 놓고 갑니다. 심지어 극장 직원들은 자기네들이 치울 것이라며 그냥 놔두라고 하거나, 상영관 출구 바로 밖에 "저희가 치우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고 버릴 것들을 구분 말고 휴지통에 넣어달라고 하고 있죠. "문화를 가장 잘 안다는" 그 기업의 캐치프레이즈는 제 눈엔 모순으로 보입니다. 문화는 디지털이나 물리적 상품을 판매한다고 해서 저절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소비자에게 싫은 소리를 해서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줄 때에 문화가 꽃피워집니다. 한국이라는 국가가 영화를 수출해서 해외에서 돈을 벌어들이고, 제작자들이 좋은 영화를 만들고 해외에서 인정을 받음으로써 영화 문화 강국이 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기본 질서부터 잘 지켜야 문화 강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극장에서 휴지통에 아무렇게 버려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휴지를 잘 구분해서 휴지통에 버려달라고 해야 문화를 만드는 기업이라고 생색낼 수 있는 것이죠.

보드게임으로 다시 넘어가 봅시다. 우리는 보드게임 "문화"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요? 우리가 단순히 보드게임을 많이 구입한다고 해서 우리나라의 보드게임 문화가 더 발전하지도 저변이 확대되지도 않습니다. 그냥 개인적인 욕구를 해결하는 것뿐이죠. 100명이 사는 마을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이 마을에 있는 한 명이 100개의 게임을 가지고 있다면 이 마을엔 평균적으로 각 주민이 1개의 게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옆에 다른 마을에도 100명이 살고 있는데, 각자 1개의 게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 어떤 마을이 더 건전한 상태입니까? 한국의 보드게이머들이 지향해야 하는 것은 우리나라를 첫 번째 마을이 아니라 두 번째 마을의 형태로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보드게임을 백개 천개 가지고 있어봤자 주변에 같이 할 사람, 알아줄 사람이 없으면 우리의 보드게임 문화는 곧 사장될 겁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소비를 늘리면 늘릴수록 그 속도는 더 빨라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보드게임을 소유하는 "상품"으로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공유하는 "문화"로 접근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격이나 디자인을 미끼로, 또는 크라우딩 펀딩과 같은 여론의 힘으로 소비를 촉진할 게 아니라, 좋은 게임을 고르는 법이라든지 게임 설명을 잘하는 방법, 게임할 때의 태도 등을 가르쳐야 할 때라는 겁니다.


우리는 10여 년 전에 우리나라에 보드게임 카페가 전국적으로 퍼지는 것을 보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대부분이 사라지는 것도 보았습니다. 일반인들은 보드게임이라는 취미가 우리나라에서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규모로 보면 예전만 못하지만) 우리는 보드게임 카페의 흥망성쇠와 상관없이 여전히 보드게임이라는 취미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당시에 보드게임 카페들이 보드게임을 서비스 상품을 파는 게 아니라, 보드게임이라는 문화를 전파하는 데에 더 신경을 썼다면, 즉 게임을 함께 준비하고 함께 치우는 것을 가르치고 단순한 게임뿐만 아니라 다양한 게임들을 할 수 있게 유도를 했다면 우리나라에서 보드게임의 저변이 어떻게 달라졌을까?"라고요.

우리는 과거로부터 이어진 길을 걷고 있고, 두 갈래 길이 앞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끝없이 이어진 길이고, 나머지는 도중에 끊어지는 길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문화로서 보드게임 취미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걷는 길은 결코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애들 낳아서 내 애들하고 보드게임 하는 것으로 충분해. 다른 사람들은 상관없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십시오. 자녀들 주위에 보드게임을 하는 친구들이 없다면 당신의 자녀 역시 보드게임을 하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끝으로, 술을 마시면서 스머프2 님이 하신 말씀을 덧붙이며 이번 여행기를 마칩니다.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
Posted by Mounted 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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